존재의 전 질량을 삶에 실어라

 


“카센터에서 주차 일을 하면서 지내다 마지막으로 스스로 물어보았지요. 여태까지 진정으로 노력하면서 살아왔는가? 죽을 힘을 다해 산거는 아닌 것 같았어요. 앞으로 얼마나 살지 모르겠는데, 돈에 연연하지 않고 평소에 꿈꾸었던 삶을 딱 3년만 죽을 각오로 살아보자, 이렇게 작심한 거지요. 그래서 태평소를 배웠어요. 시켜만 주면 열심히 하겠다고 부탁해 친구 사물놀이패에 들어가 정말 죽을 둥 살 둥 열심히 했어요. 그렇게 살다 보니 어디선가 감춰져 있던 노래가 터져 나오는 겁니다. 어느 날 골목길에 장미가 피어있는데, 그 화려한 장미에게서가 아니라 장미 밑에 감춰진 하얀 찔레꽃에서 향기가 퍼져 나옵디다. 그 향기에 울어버렸어요. 아, 이게 나구나, 늘 세상의 주변에서 쭈뼛쭈뼛 눈치나 보면서 사는 가련한 사람들이 저 찔레꽃이구나, 그들이 세상에 향기를 주는 구나…”

- 소리꾼 장 사익, 2007. 5. 24일 세계일보와의 인터뷰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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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심에는 작은 결심이 있고 큰 결심이 있습니다. 작은 결심은 자신의 에너지의 일부를 걸고 삶의 일부를 개선하겠다는 다짐입니다. 부분적인 헌신입니다. 예를 들면, ‘체중을 5kg 줄이겠어.’ ‘담배를 끊겠어.’ ‘일주일에 한권씩 책을 보겠어.’와 같은 결심을 말합니다. 그에 비해 큰 결심은 에너지의 전부를 걸고 삶의 전체(구조)를 바꾸겠다는 다짐입니다. 최선의 삶을 살겠다는 전적인 헌신을 의미합니다.
흔히 큰 결심이 동반되지 않은 작은 결심은 지속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하나의 시도’에 그치고 마는 경우가 많습니다. 많은 알코올 중독환자들의 회복과정을 보면서 제가 깨달은 교훈 중의 하나는 ‘술을 끊겠다.’는 작은 결심으로는 단주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회복하는 사람들은 ‘최선의 삶을 살아가겠다.’는 큰 결심을 가지고 삶 전체를 바꾸겠다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오프라 윈프리 역시 권투선수 타이슨보다 더 나가는 체중 때문에 고민에 빠져 온갖 다이어트프로그램에 매달려왔습니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면서 좌절에 빠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인생의 목표가 더 이상 다이어트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깨달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토크쇼를 세계 최고의 것으로 만들겠다는 큰 결심을 하게 됨으로써 다이어트라는 작은 결심을 성공시킬 수 있었습니다.
개선이든 혁명이든 삶을 바꾸려면 큰 결심이 필요합니다. 큰 결심은 존재의 전 질량과 전 에너지를 필요로합니다. 큰 결심을 가질 때 비로소 우리는 작은 일에 안달하지 않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의 한마디에 일희일비하는 소모적인 마음이 사라지게 됩니다. 삶은 단순화되고 자신에게 집중되어 정말 중요한 일에 관심과 에너지가 모이게 됩니다. 
당신은 존재의 전 질량을 삶에 실어본 적이 있습니까? 


- 2008. 6. 12 週 2회 '당신의 삶을 깨우는' 문요한의 Energy Plus [207호]-



소리꾼 장사익 

서울 신사동 카센터에서 주차관리하던 장사익은
딱 3년만 노래에 인생을 바치기로 작정하고
집을 나섰다. 마흔 다섯,
무엇인가 새로 시작하기에는 두렵고 난감한 나이였다.

그러나 3년만이라도 평생 그리워 해온 일을 하고 싶었다.
1993년 공주농악에서 새납(태평소)으로 장원한 사람,
사물 놀이패를 따라다니며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새납 불던 사람,
무대 한쪽에 서 있다가 수줍게 웃던 사람,
주연들의 공연 끝나고 뒤풀이 자리에서 한 곡 구슬프게 불던 사람,
그가 소리꾼 장사익이다.

◇ "내게 노래는 팔자고 운명이다"

지나온 세월은 고단하고 못마땅했다. 노래 없이 살 수 없었고
노래만으로 살 수도 없었다.
뿌리내릴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발길이 닿으면 가슴이 떠날 것을 재촉했고,

가슴이 닿는다 싶으면 회사가 문을 닫았다.
무역회사, 보험회사, 제지회사, 가구회사, 카센터….
30년 사회생활 동안 열 대여섯 곳을 떠돌았다.
노래말고는 재주도 기술도 없었다. 그는 어디서든 몸으로 때우는 일을 했다.
요령 없이 장롱을 나르다가 허리를 다쳐 고생도 했다.
3년 동안 카센터에서 그가 했던 일은 주차관리와 배터리 교환이었다.
노래…. 노래는 세상에 날 때부터 하고 싶었다. 충남 홍성군 광천의 농악대에서
장구 잘 치던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초`중학교 시절 5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뒷산에 올라가 고함을 질렀고
노을지는 강둑에 서서 태평소도 불었다.
당시 농악대에서 태평소 불던 김관섭 아저씨가 평생 마음의 우상이었다.
마음에는 언제나 노래가 있었고, 방 한구석에는 늘 기타가 있었다.
고교 졸업 후 직장생활 3년 동안 저녁마다 음악학원엘 다녔다.
군대시절엔 광주 문선대에서 싱어도 했다. 좋은 시절이었다.
기타 치며 노래하던 좋은 세월은 짧았다.
세상사에 민첩하지 못한 농부의 아들이었고, 음악은 밥벌이가 되지 않았다.
그는 자기 이상을 위해 처자의 호구를 외면할 위인은 못됐다.

노래와 생활 사이에서 장사익은 고통스러웠다.
생활인으로 그는 노래할 수 없었고, 노래할 수 없는 소리꾼으로 그는 슬펐다.
가슴에서는 언제나 어린 귀로 들었던 김관섭의 태평소 소리가 울렸다.
본격적으로 노래를 시작하기 전에 찍은 사진은
대부분 찡그리고 풀죽은 얼굴이다.
노래를 시작한 후 찍은 사진 속 얼굴은 언제나 웃고 있다.
장사익, 그도 몰랐던 표정의 변화였다.
"내게 노래는 엄마의 탯줄 같아요. 노래 없이 살 수 없었어요.
그렇다고 가수가 되겠다는 생각은 못했어요. 먹고살아야 했으니까."

◇ 공연 끝에 유행가를 부르는 이유

장사익의 공연을 본 사람들은 묻는다.
어째서 공연의 마지막은 늘 유행가냐고.
소리꾼 장사익은 이벤트 회사가 키운 '기획 스타'가 아니다.
공연의 조역으로, 공짜 혹은 매우 싼값에 불러 다녔다.
그저 따라 다닐 뿐 무대에 서지 못하는 날도 있었다.

그가 주인공인 무대는 언제나 뒤풀이 장이었다.
유명인들의 공연이 끝난 후,
출연진들의 노고를 격려하는 뒤풀이 자리가 장사익의 무대였다.
자기노래가 없었고, 유행가를 장사익 식으로 불렀다.
요즘도 공연마다 유행가를 부르는 것은 그랬던 시절을 기억하기 위해서다.

이유는 또 있다.
"내 노래의 가사는 모두 시에서 나왔어요. 내가 쓰지 않았을 뿐 인생철학이고
내밀한 일기인 셈이죠. 그래서 주관적입니다.
게다가 낯선 가사, 낯선 음, 낯선 방식이에요.
주관적으로 쓴 일기는 진지하고 어렵기까지 해요.
노래는 관객과 나 사이의 소통채널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너무 진진한 대화는 어렵고 지루하기 십상입니다.
대화에는 유머가 필요합니다.
마지막을 장식하는 유행가는 관객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유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노랫말을 찾기 위해 시집을 읽는다고 했다.
서점에서 시집을 읽거나 신문과 잡지에 나온 시도 찾아서 읽는다.
내 마음과 통하는 시를 만나면 노래로 바꾼다.
누군가 좋다고 추천한 시라고 노래로 만들지 않는다.
자기 마음과 통하지 않는 시는 노래로 만들지 않는다.
장사익의 노래는 독백이자 내면의 일기이기 때문이다.

◇ "직접 작곡, 그러나 악보는 안 써"

그는 마음에 닿은 시를 찾으면 열 번이고 백 번이고 흥얼거린다.
호흡에 따라, 또 불현듯 왔다가 사라지는 감정에 충실하며,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달이 뜨고 별이 질 때까지 읊조린다.
그 속에서 음은 자연스럽게 자라난다. 그래서 그의 노래는 무정형이다.
국악, 재즈, 가요풍, 재즈풍이 구별 없이 섞여 든다.
그래서 처음 들으면 황당하다.
그러나 곧 그것이 가장 자연스럽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의 노래, '섬' '국밥집에서' '허허바다'
'파도' '기침' 등을 들으면 확연해진다.
"시를 찾는 일이 노래 만드는 작업의 90%에요. 마음 통하는 시를 찾아
자꾸 읊조리는 동안 저절로 음이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장사익을 두고 '노래를 작곡하는 사람이 아니라
빚는 사람'이라고 혹자는 말한다.
음이 만들어지면 여러 사람들 앞에서 읊조린다.
누군가는 악보로 만들고, 또 누군가는 끼여들고 물러선다.
다양한 악기와 화음이 장사익의 노래 속으로 들어왔다가 나가기를 거듭한다.
그리고 비로소 노래가 탄생한다.
장사익의 노래에는 음 없이 '아니리'처럼 혹은 '
대사'처럼 읊조리는 부분이 종종 등장한다.

"내 노래는 흥얼거리는 동안 저절로 자라난 것입니다.
노래는 박자가 아니라 호흡이지요.
자연스럽게 자라나지 않는 부분에 억지로 음을 달지는 않습니다."
그는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게 아니라,
봄비 내리고 꽃이 피니 봄이라고 했다.
가을이 와서 낙엽 지고 서리 내리는 게 아니라,
낙엽 지고 서리 내리니 가을이라고 했다.

계절도 노래도 자연스러운 호흡이라고 했다.
장사익은 거의 두 시간에 이르는 공연 동안 잠시도 쉬지 않는다.
저 작은 체구에서 어떻게 저런 힘이 솟아날까 싶을 만큼 쏟아낸다.
무대 위에서 그는 혼신을 쏟고, 공연히 끝나면 무너진다.
"기진맥진할 정도로 쏟아내야 개운해요. 있는 대로 다 쏟아내는 거지요."
그는 공연이 끝나면 며칠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쉰다고 했다.

◇ 초로의 나이에 소리꾼 데뷔

장사익은 올해 쉰 여덟이다.
서른만 넘어도 '늙은이' 취급받는 한국 연예계에
그는 마흔 여섯, 수염 희끗희끗한 얼굴로 데뷔했다.
이미 30년 가까운 세월 직장생활을 한 후였다.
장사익은 지금이 가장 노래하기 좋은 나이라고 했다.
40대에는 사십 먹은 남자의 노래를 했고,
50대에는 오십 먹은 남자의 노래를 했다.
60, 70이 넘으면 지팡이 짚고 그 노인의 노래를 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나이가 들어서도 배우기를 멈추지 않는다.
요즘은 혼자 붓글씨를 배우고 있다고 했다.
너무 늦은 나이는 없으며 언제든 출발선에 설 수 있다고 했다.
출발선에 선 자는 행복하다고 했다.
무대 위에서 장사익은 전부를 건다. 모두를 걸고,
최선을 다하면 그만이다. 관객이 한 명이든 1천 명이든 마찬가지이다.



"많을 때는 3천800명의 관객과 마주 서서 노래한 적이 있었어요.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관객은 나와 소통하지 않아요.
한 사람이 듣고 만족하지 않으면 백 사람이 들어도 만족할 수 없어요."
그는 무대에서 최선을 다 하지 않거나, 진정성을 잃은 적은 한번도 없다고 했다.
무대뿐만 아니라 생활에서도 그런 듯 했다.

집안 청소를 하고, 손님을 맞고, 차상과 다과상을 내오고, 치우기까지 했다.
인터뷰 중 택배 배달원의 전화를 받자 맨발에 고무신 꿰차고 제비처럼 달려나갔다.
손에는 어느새 주스 한 병까지 챙겨 들었다.
"내가 재발라요. 일 빨리 해야 마누라한테 욕 안 먹어유."
그는 시종일관 끝이 모호한 충청도 사투리로 이야기했고,

걸려온 전화를 큰 목소리로 받았다.
"그래, 그리혀어, 알았어어, 전화 줘."

내놓은 다과를 남기지 말고 먹으라고 했다.
함께 점심을 먹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숟가락을 놓고 기다리는 동안 그는 남은 음식을 꾸역꾸역 먹었다.
'아까운 음식을….' 인터뷰를 마치고 자신의 집 근처 서울 평창동 골목골목을
자동차로 돌며 전시관`문학관`박물관을 구경시켜주었다.
헤어질 때는 택시보다 버스가 재미있고 값도 싸다며
굳이 버스 정류장 근처에 내려주었다.
버스 편을 챙겨주고 친정 온 딸 배웅하듯 '어여 가라'고 여러 번 손을 흔들었다.

△장사익=1949년 충청남도 홍성군 출생. 1996년 KBS 국악대상,
음반으로 1집 '하늘가는 길', 2집 '기침', 3집 '허허바다',
4집 '꿈꾸는 세상'을 냈다.
5집을 준비 중이다.
악보도 없이 흥얼거리던 그의 노래 대부분은 나중에 발굴돼 세상에 나왔다.





깊게 패인 입가의 주름, 희끗희끗한 턱수염, 손을 쓸어 넘긴듯한 머리칼...
북한산 자락의 집에서 만난 소리꾼 장사익의 너털 웃음은 여전했다.


2층 응접실 겸 작업실의 한쪽은 벽면 전체가 통유리로
북한산이 시원하게 내려다 보인다.


장사익이 손님 접대를 위해 다기에 손수 끓인 중국 보이차를 내놓았다.


찻잔 테이블을 겸한 응접실 나무 탁자.


슬프디 슬픈 꽃망울로 툭 터진 ‘하얀 노래’


[시대의 소리꾼 장사익] ① 욕심도 사랑도 죽음도 엮어.
마흔세 살 카센타 더부살이 삶에 불어온 찔레꽃향기.

왜 찔레꽃 향기가 너무 슬프다고 했을까?

그는 찔레꽃 향기가 너무 슬퍼서 목놓아,
그것도 모자라 밤새워 울었다고 노래했다.
아니 노래를 불렀다기보다 울부짖었다.

이 시대 최고의 소리꾼으로 불리는 장사익(59).
가슴이 떨렸다.
보름전 인터뷰 약속을 하고,
막상 그를 만난다고 생각하니 진한 흥분이 온 몸을 감쌌다.
지난 26일 그와의 인터뷰는 그의 노래가 너무 좋아서,
마치 광(狂)팬의 마음가짐으로 진행됐다.
자하문 너머 보이는 북한산 자락에 자라잡은 그의 자택 2층.

한쪽 벽면을 통유리로 만들어
북한산 기슭이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그의 응접실이자 작업실에서
그가 끓여주는 중국 보이차를 마시는 호사를 누렸다.

전날 예술의 전당에서 펼친 ‘노래판’의 피곤이 가시지 않은 얼굴.
그러나 깊은 주름과 적당히 자란 희끗희끗한 턱수염이 잘 어울린다.


응접실 한쪽에 있는 징.


우리 가요 악보책과 기타가 놓여 있고
창밖을 바라보며 장사익이 노래를 연습하는 곳.
악보책엔 ‘목포의 눈물’이 펼쳐져 있다.



♬ 목포의 눈물 악보책.♪


‘이건 아니다’
생각에 새납(태평소) 딱 3년 배워 인생 바꾸기로.

데뷔작이자, 대표작으로 꼽히는 <찔레꽃>의 가사에 대한 궁금함으로
실타래를 풀었다.

“왜 찔레꽃 향기가 슬프다고 했죠?”

(사실 이 노래를 늘 즐겨 들으며 궁금했다.
찔레꽃 향기에 대해 별다른 선입견은 없지만,
꽃 향기에 진한 슬픔을 이입시키는 것은 예사롭지 않았다.)

“아마 1992년 말께었죠.
내가 43살 때였을 것입니다.
그때 변변한 직업도 없이 친척이 하는 강남의 카센타에서
수리하러 온 차를 주차시키며 살아가던 때였죠.
바닥이었습니다.
생의 바닥이라고 느껴졌어요.
‘이건 아니다’라고 울분을 토하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새납(태평소)를 배우기로 했어요.
더늦기 전에 하고 싶은 것을 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그는 40대 초반 자신 인생의 역전을 꿈꿨단다.
그럼 인생 역전과 찔레꽃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그는 자신이 작사 작곡한 <찔레꽃>에서
찔레꽃을 ‘별처럼 슬프고, 달처럼 서럽다’고 표현했다.

“봄이면 배 고파 들판에서 따먹던 그 꽃에 내 모습이…”
찔레꽃이 그의 입을 통해 피어나기 시작한다.

“그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어요.
그때는 잠실 고층 5단지에 살았어요.
5월 어느날 아파트 단지를 나오는데 어디선가 진한 꽃 향기가 느껴졌어요.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에 실려온 꽃 향기였어요.
주변을 보니까 붉은 장미만 눈에 띄었어요.
분명 장미냄새는 아니었어요.
장미덩쿨를 살피고 있는데
흰 꽃잎의 찔레꽃이 수줍게 피어 있는 것이 보였어요.
순간 어릴 때 기억이 났어요.
봄이면 들판에 핀 찔레꽃을 따 먹곤 했어요.
찔레꽃은 회충을 죽인다고 어른들이 말하곤 했어요.
장미덩쿨 뒷쪽에 나지막히 옹기종기 피어 있는 찔레꽃이 너무 아름답게 느껴졌어요.
그리고 그 찔레꽃이 내 모습처럼 보였어요.
당당히 나서지 못하고, 폼잡지 못하고, 쭈삣쭈삣 눈치나 보고 있는,
그런 모습과 나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슬퍼졌어요, 그냥 슬펐어요.”

장사익은 그 감정으로 <찔레꽃> 노래를 만들어냈다.
“막 울었어요.
그리고 막 토해냈어요.
슬픔을 쏟아내니 개운해졌어요.
슬픔이 씻겨나가고 마침내 기쁨으로 승화되는 느낌이었어요.”

피아노의 조용한 반주 속에 나지막하게 시작되는 그의 <찔레꽃>을
다시 한번 음미해 본다.
“하얀 꽃 찔레꽃/
순박한 꽃 찔레꽃/
별처럼 슬픈 찔레꽃/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나지막하게 읊조리듯 시작한 이 노래는 점차 톤이 올라간다).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목놓아 울었지/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밤새워 울었지/
(이제 중창단과 함께 반복한다).

· · · 후 렴 · · ·

아! 노래하며 울었지/
아! 춤추며 울었지/
아! 당신은 찔레꽃”

비록 가사에서는 ‘당신은 찔레꽃’이라고 했으나 사실은 그 자신이었다.
그리고 중년의 남자가 꽃향기에 취해 울었다.
어느날 바람에 실려 온 꽃향기를 취해 만든 <찔레꽃>.

이 노래는 장사익 본인뿐 아니라
이 노래를 듣는 많은 이들의 감정샘과 눈물 샘을 오늘도 진하게 자극한다.


장사익이 서툴게 잘라온 사과와
외출했다가 뒤늦게 귀가한 부인이 내놓은 딸기.


소리꾼 장사익에게 풍경소리는 어떻게 들릴까.

술집 벽지에 휘갈겨 쓴 시, 쓰레기통에서 찾아서 거침없이.


이번엔 그의 자유롭고 거침없는 노래풍을 그대로 보여주는
<국밥집에서>의 가사를 물었다.

노래 중간에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니 희망이 족할까”라는
익숙한 ‘희망가’가 삽입된 이 노래의 후반부에는
장사익이 비장한 톤으로 외친다.
“그렇다/
저 노인은 가는 길을 안다/
끝내 흙으로 돌아가는 길을 안다”

노인의 죽음을 초월한,
인생을 달관한 경지를 한 줄로 표현한 이 노래를 들으면
속세의 부질없는 욕심이 부끄럽기만 하다.

“이 노래의 가사는 누가 만든 것이죠?”

“최 산이라는 친구가 있어요.
그 최 산이 강남의 어떤 술집벽에 휘갈려 놓은 시죠.
항상 이 시가 좋다고 생각하며,
언제나 저 시로 노래를 만들어야지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마음먹고 그 술집을 갔는데
벽지를 새로 한다고 모두 쓰레기통에 버린거예요.
그래서 쓰레기통을 뒤져서 그 시를 찾아 냈어요.
그리고 노래를 엮었죠.”

엮는다.
그는 노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엮는다’고 표현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삶을, 노래를, 인생을, 고뇌를, 욕심을, 죽음을,
사랑을 줄줄이 엮는다.
그리고 그가 엮은 노랫 가락은 그의 입을 통해,
누에고치가 비단실을 풀어내듯 줄줄이 내 뿜는다.

그의 흥얼거림과 온 몸을 감싸는 끈끈함은 듣는 이의 감각을 마비시킨다.
과연 어디서 그의 노래가 품고 있는 마력과 괴력이 생겨난 것일까?
(계속)

기사등록 : 2007-01-30 오전 11:43:42



꽃을 사랑한다면...
꽃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꽃에 물주는 것을 잊어버린 여자를 본다면
우리는 그녀가 꽃을 사랑한다고 믿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사랑하고 있는 자의 생명과 성장에 대한
우리들의 적극적 관심인 것이다.
이러한 적극적 관심이 없으면 사랑도 없다.


-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에서




적극적 관심은 실천의 다른 표현입니다.
긍정과 낙관주의 역시 실천이 뒤 따를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실천은 계획과, 관심과, 긍정과 열정이라는 인풋(in-put)을
탁월한 성과라는 결실로 이어주는 징검다리입니다.


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 내 삶을 위해서 무엇을 걸고, 무엇에 미쳤보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