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산사 보타전, 강원도 낙산해수욕장 부근의 절의 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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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절에 대웅전은 없고, 보타전과 원통보전이 존재하는 낙산사...


보타전 올라가는 길의 보타락 앞의 연못...
















공중사리탑 부처님 진신사리 출현에 대한 내용...


사리와 사리신안에 대한 유래를 설명한 글...














낙가산 낙산사는 강릉에서 약 72km의 거리에 있으며 행정구역상으로는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전진리55번지에 속해 있다. 한말에는 금강산 건봉사의 말산이었으나 규모와는 달리 매우 유서 깊은 사찰이다.낙산사를 건립한 의상조사는 신라 진평왕47년에 출생, 29세 때 황복사를 출가하였다. 속성은 김씨였다.{삼국유사}에는 문무왕원년(661), 37세의 나이로 당에 들어가 그곳에서 10년간 수업한 뒤 671년에 귀국했다고 적혀 있다. 671년이라면 고구려가 멸망 한 지 3년째되는 해로 당이 한반도 전체를 직접 지배할 것을 꾀하여 신라와 당 사이에 한창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때이다. 숱한 간난신고를 겪고 귀국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와 당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자 신라 재상 김인문.양도등이 당으로 건너갔다가 붙잡혔다. 당의 고종은 대거 동정 할 뜻이 있어 김인문등이 이를 알고 몰래 의상에게 귀뜸했다.의상은 당군의 출정에 앞서 서둘러 본국으로 돌아와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이에 조정에서는 신인종의 대덕명랑에게 명하여 곧 밀단법(密壇法)을 만들기도를 통해 국난을 면하고자 하였다.낙산사의 건립의 연기(緣起)에 의하면,의상은 당에서 돌아온 그해에 동해안의 해변굴에서 진신관음을 손수 보고 낙산사를 건립하였다고 한다. 의상이 낙산사를 세우면서 오직 한마음으로 기도하고 소원한 것이 지금도 남아 있는 {백화도량원문(白花道場願文)}이다. 이 밖에 의상은 702년78세로 죽을 때까지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 {십문간법관(十門看法觀)}, {입법계품초기(入法界品炒記)}, {소아미타경의기(小阿彌陀經義記)}등 많은 책을 썼다. 의상대사는 문하에 오진, 지통, 표훈, 직정, 직장, 도융, 양원, 상원, 능인, 의적등 많은 고승을 배출하였으며 훗 날 고려 숙종으로부터 해동화엄시조원교국사(海東華儼始祖圓敎國師)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는 당에서 귀국하자 국내의 산하를 편력하면서 적지라고 생각되는 요소요소마다 절을 세웠으며 676년에는 왕명으로 태백산에 들어가 부석사를 세우고 해동화엄종을 창시하였다고 한다.낙산사 입구라고 표시된 돌기둥이 있는 곳에서 양쪽에 소나무가 늘어져 있는 길을 약600M가량 걸어가면,조선 세조13년(1467)에 건립됐다는 홍예문이 보인다. 남한산성 북문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문으로 화강암을 쌓아 올린 돌담위에 문액이 서 있고 2단의 초석위에 26개의 돌을 쌓아 아치형을 이루게 만들어져 있다.문을 지나서 약간 내리막길을 걸어 내려가면 길이 갈라지면서 거기{홍련암660m,의상대 470m,해수관음보살 340m}라는 표지가 서 있다.사천왕문을 들어서면 바로 안뜰이 나서고 그 왼 편에 봉향각, 오른쪽에 범종각이 있다. 이 범종은 조선왕조 초기의 동종으로 높이 1.5m,종에 새긴 찬문은 당시의 명유 김수온이 지었고 글씨는 명필 정난종이 썼다. 조선왕조 초기 금속공예 기술의 수준을 대표하는 귀중한 동종으로 세조가 대비.왕세자와 더불어 낙산사에 행차하였을 때 선승 학열에게 명하여 낙산사의 가란을 중창케 하면서 함께 주조토록 했다고 한다.그런데 배불숭유(排佛崇儒)를 국시로 했던 조선시대에 유독 세조만은 불교흥륭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속리산 입구에 있는 정2품 소나무에도 세조와 관련된 전설이 남아 있다.낙산사에는 세조 때에 세워진 7층석탑이 있다. 탑의구조는2층의 기단위에 7층을 올려 놓은 형태로서 두번째 기단에는 복예연판(複蘂漣辦)이 조각돼 있다. 각 층마다 넓은 방형의 받침돌을 끼워넣어 다층탑과 같은 느낌을 준다.안뜰 정면에는 1953년에 재건된 낙산사의 정전 원통보전(圓通寶殿)이 있다.낙산사가 있는 산 이름을 낙산이라고 한 것은 천축의 보타(寶唾)와 낙가산에서 딴 것이라 하며 이 낙산 동쪽 바닷가에 바닷물이 출렁이는 굴이 하나 있었는데 이 굴은 대비진신(大悲眞身)인 백의대사(白衣大師)가 거처하던 성지라고 한다. 이곳은 항시 바닷물이 출렁거리고 파도가 심하려 일찍 아무도 들어가 본 사람이 없는 곳이기에 불교의 성지로 널리 알려져 왔었다. 강원도 양양 작산에 성지가 있다는 말이 널리 퍼지자 의상대사가 이 성지에서 대비진신에게 예불하려고 찾아왔다. 대사는 이곳에 와서 사람을 시켜 바닷물에 돗자리를 깔게 하고 목욕재계한 다음 그 돗자리애 올라 앉았다. 그랬더니 바다 속애서 여덟 마리의 용이 나와 대사를 모시고 굴속으로 들어갔다. 대사가 굴 속으로 들어가 그안에 안치되어 있는 부처님께 예불하니 공중에서 수정염주(水晶念珠)가 내려 오기에 그염주를 받아 가지고 굴을 나오자 용이 다시 나타나 여의주를 바치며 [용왕께서 말하기를 이 낙산 위에 올라가면 대나무 두 그루가 나 있는 곳이 있을 것이니 그곳이 바로 명당자리인 바 그곳에 절을 지으면 불법이 크게 일 것이다]라고 일러 주고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대사는 그길로 낙산으로 올라가 일러 준 자리를 아무리 찾아보아도 대 같은 것이 없어 실망하여 한참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멀리 바라보이는 동해에서, [대사는 너무 성급하개 찾지 마시오. 때가 되면 찾을 수가 있으리다.]라는 말소리가 바람을 타고 아련히 들려왔다.대사는 느낀 바 있어 그 자리에 앉아 염주를 굴리며 있노라니까 바로 눈 앞에서 두 줄기의 붓끝 같은 죽순이 솟아오르기 시작하여 보고 있는 동안에 큰 대나무로 자랐다. 대사는 그제야 바로 이곳이 명당임을 깨닫고 법당을 지었으니 그것이 바로 원통보전 (圓通寶殿) 이라고 한다.



落山은 산스크리트 보타락가(補陀洛伽)의 준말로서 관세음보살이 항상 머무르는 곳이라고 한다. 낙산사는 우리나라 3대 관음도량 가운데 하나로 해변에 위치한 특이한 구조를 갖춘 절이다. 시·도 유형문화재 35호로 지정된 낙산사는 통일신라 문무왕 16년(676년)에 의상대사가 기도를 하다가 관세음보살을 만나 보살이 가르쳐 준 곳에 지은 법당이라고 한다. 도량에는 언제나 자비로운 관음보살의 손길이 있기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관음의 진신이 상주하는 도량 낙산사... 이 절은 세상이라는 바다에서 난파당한 사람들을 관음보살 자비의 손길로 구하려는 발원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아쉽게도 지난해(2005년 4월 6일)큰 산불 피해를 입은 양양 낙산사... 복원이 올해부터 본격화 되어 2008년까지 완전 복구한다고 한다.. ☞.낙산사 창건설화 낙산사는 신라의 고승 의상(義相)이 창건했다. 중국 당나라의 지엄(智儼) 문하에서 화엄교학(華嚴敎學)을 공부한 의상이 신라로 돌아온 해는 문무왕 10년(670)이었다. 그 후 어느 해에 의상은 낙산의 관음굴(觀音窟)을 찾았다. 그는 지심을 기도하여 관음보살을 친견했고, 그리고는 낙산사를 창건했다. 낙산사의 창건 연기설화는 『삼국유사』에 전한다. 이 책「낙산이대성(洛山二大聖)」조에 전하는 설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예전에 의상법사가 처음 당나라에서 돌아와서 대비진신(大悲眞身)이 이 해변의 굴 속에 계시기 때문에 낙산(洛山)이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 대개 서역에 보타낙가산(寶陀洛伽山)이 있는데, 여기서는 소백화(小白華)라고 하고 백의대사(白衣大士)의 진신이 머무는 곳이기에 이를 빌려서 이름한 것이다. 의상은 재계(齋戒)한 지 7일 만에 좌구(座具)를 물 위에 띄웠는데, 천룡팔부(天龍八部)의 시종이 그를 굴 속으로 인도하여 들어가서 참례함에 공중에서 수정염주(水精念珠) 한 벌을 주기에 의상은 이를 받아서 물러 나왔다. 동해룡(東海龍)이 또한 여의보주(如意寶珠) 한 벌을 주기에 의상은 이를 받아서 물러 나왔다. 다시 7일 동안 재계하고서 이에 진용(眞容)을 뵈고, "이 자리위의 꼭대기에 대나무가 쌍(雙)으로 돋아날 것이니, 그곳에 불전(佛殿)을 짓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법사가 그 말을 듣고 굴에서 나오니 과연 땅에서 대나무가 솟아났다. 이에 금당을 짓고 소상(塑像)을 봉안하니, 그 원만한 모습과 아름다운 자질이 엄연히 하늘에서 난듯했다. 대나무는 다시 없어졌으므로 바로 진신이 거주함을 알았다. 이로 인하여 그 절을 낙산사라 하고서 법사는 그가 받은 구슬을 성전에 모셔두고 떠나갔다.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 신라시대의 고승. 우리나라 화엄종 의 개조. 성은 김씨. 한신의 아들이다. 19세 때(29세에 출 가하였다는 설도 있으나, 최근의 고증을 따랐음.)경주 황복사에 출가하였다. 얼마 뒤 중국으 로 가기 위하여 원효와 함께 요동으로 갔으나, 고구려의 순라군에게 잡혀 정탐자로 오인 받 고 수십일 동안 잡혀 있다가 돌아왔다. 10년 뒤인 661년(문무왕1) 귀국하는 당나라 사신의 배 를 타고 중국으로 들어 갔다. 처음 양주에 머무를 때 주장 유지인이 그를 관아에 머무르게 하고 성대히 대접하였다. 얼마 뒤 종남산 지상사에 가서 지엄을 청하였다. 지엄은 전날 밤 꿈에 해동에 큰 나무 한 그루가 나서 가지와 잎이 번성하더니 중국에 와서 덮었는데, 그 위에 봉의 집이 있어 올라 가 보니 한 개의 마니보주 의 밝은 빛이 멀리까지 비치는 꿈을 꾸었다고 하면서, 의상을 특 별한 예로 맞아 제자가 될 것을 허락하였다. 그 곳에서 <화엄경>의 미묘한 뜻을 은밀한 부 분까지 분석하였다. 당나라에 머무르면서 지엄으로부터 화엄을 공부한 것은 8년 동안의 일 이며, 나이 38세로부터 44세에 이르는 중요한 시기에 해당한다. 의상이 터득한 화엄사상은 넓고도 깊이 있는 것이었다.

▶.원효성사 관음보살은 이 세상의 하고 많은 중생들을 구하고자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낙산사의 관음보살 또한 여러 모습으로 화현(化現)해서 교화했다는 경험설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한 마리 파랑새로 변한 관음이 사람들을 일깨워 준다는 이야기는 더욱 흥미롭다. 물론 지극한 정성과 독실한 신앙을 지닌 사람들에게만 파랑새는 그 모습을 나타낸다. 두터운 우정을 나누던 도반(道伴)인 의상이 동해의 관음굴에서 관음보살을 친견했다는 소문을 전해 들은 원효(元曉)가 의상에게 뒤질세라 관음을 친견하기 위해서 낙산사로 향했다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그 한 예가 된다. 원효가 낙산사의 남쪽 교외에 이르렀을 때 흰 옷을 입은 여인이 벼를 베고 있었다. 원효가 장난삼아 그 벼를 얻고자 청했다. 여인 역시 '벼가 없다.'고 장난으로 대답했다. 원효가 다시 길을 가다가 다리 밑에 이르렀을 때 한 여인이 월수백(月水帛)을 빨고 있었다. 원효가 물을 청함에 연인은 그것을 빨던 물을 떠서 주었다. 원효는 그 물을 쏟아버리고 손수 깨끗한 물을 떠서 마셨다. 그 때 들판에 있던 소나무 위에서 한 마리 파랑새가, "제호를 마다한 화상(和尙)아!"라고 하고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그 소나무 아래에는 신발 한 짝이 벗겨져 있었다. 원효는 비로소 앞에서 만났던 여인이 곧 관음보살의 진신(眞身)임을 깨달았다. 이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은 그 소나무를 관음송(觀音松)이라고 불렀다(의상대 옆 위치). 원효는 관음성굴에 들어가 그 진용(眞容)을 보려했지만 파도가 크게 일어 들어가지 못하고 떠났다. - 삼국유사 - 권3

▶.범일국사 굴산조사(堀山祖師) 범일이 태화년간(827∼835)에 당나라에 들어 갔다. 명주(明州)에 있는 개국사(開國寺)에 이르니 왼쪽 귀가 잘린 한 스님이 말석(末席)에 앉아 있다가 조사에게 말했다. "저도 신라 사람입니다. 집은 명주계(溟洲界) 익령현(翼嶺縣) 덕기방(德耆坊)에 있었다. 조사께서 후일 본국으로 돌아 가시거든 반드시 제 집을 지어주셔야 하겠습니다. " 이윽고 조사는 여러 곳을 두루 다니다가 염관 제안스님으로부터 법을 얻고 회창7년(847)에 고국으로 돌아 왔다. 스님은 먼저 굴산사를 세우고 불교를 전했는데, 858년 2월 15일 밤 꿈에 전에 중국에서 보았던 스님이 창문 밑에 와서 말했다. "전에 명주 개국사에서 조사와 언약을 하여 이미 승낙을 얻었는데 어찌 이렇게 실천이 늦습니까?" 조사는 놀라 깨어 수 십명을 데리고 익령 가까이 가서 그가 사는 곳을 찾았다. 물어보니 한 여인이 낙산 아랫마을에 산다 하므로, 그 이름을 알아 보니 덕기(德耆)라고 했다. 그 여인에게는 한 아들이 있었는데, 나이 겨우 여덟 살이었다. 늘 마을 남쪽 돌다리 가에 나가 놀더니 하루는 그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와 함께 노는 아이 중에 금빛 나는 아이가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조사에게 이 사실을 말하니 조사는 놀랍고 기쁘기도 하여 그녀의 아들을 데리고 그 아이가 놀던 다리 밑에 가서 찾으니, 물 속에 석불상 하나가 있었다. 꺼내어 보니 왼쪽 귀가 떨어져 있는 것이 예전 중국에서 만났던 그 스님과 같았다. 곧 정취보살이었다. 이에 조사가 절 지을 곳을 점쳐 보니 낙산 위가 좋다고 하므로, 불전 3칸을 짓고 그 상을 모셨다.

▶.조신의꿈 강원도 영월군 대화산(大華山)에는 세달사(世達寺)가 있었다. 의상 대사의 손제자(孫弟子) 신림(神琳)스님이 이 절에 주석했던 사실로 보아서는 8세기 중반 무렵에 창건된 화엄종 사찰로 보인다. 이 세달사에 딸린 부속 농장인 장원(莊園)이 강릉에 있었는데, 젊은 승려 조신(調信)이 장원에 파견되어 관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신은 태수 김흔(金昕)의 딸을 짝사랑하여 맺어질 수 있도록 낙산사 관음보살에게 날마다 기도햇다. 그러나 몇 년 사이에 그 여인은 결혼하고 말았다. 조신은 관음보살상 앞에서 원망하며 날이 저물도록 슬피 울다가 지쳐서 잠이 들었다. 그리고는 꿈을 꾸었다. 사모하던 아가씨가 찾아와서 웃으면서 말했다. "저도 속으로 스님을 사랑했지만 부모님의 명령을 못 이겨 다른 사람에게 시집갔습니다. 그러나 이제 스님과 부부의 연을 맺고자 다시 왔습니다. " 조신은 매우 기뻐하며 함께 향리로 돌아가서 40여 년을 함꼐 살았다. 자녀 다섯을 두었지만 가난하여 생계를 꾸리기조차 어려웠다. 10여 년을 사방으로 돌아다님에 옷은 찢어지고, 열 다섯 살 큰 아이는 굶어 죽기까지 했다. 그들은 네 자녀를 데리고 우곡현(羽曲縣)의 길가에 띳집을 짓고 살았다. 늙고 병들었으며 또한 굶주려서 일어나지도 못했다. 열 살난 딸이 밥을 얻으러 다니다가 개에 물려 울면서 와서 부부 앞에 눕자 부모도 흐느껴 울었다. 부인이 눈물을 훔치면서 갑자기 말했다. "내가 당신과 처음 만났을 때는 얼굴도 아름다웠고 나이도 젊었습니다. 그리고 의복도 고운 것이었습니다. 한 가지라도 맛좋은 음식이 있으면 당신과 나누어 먹었고, 두어 자 옷감이 생겨도 당신과 함께 지어 입었습니다. 이렇게 살아온 지 15년, 정은 더할 수 없이 쌓였고 사랑은 얽히고 설켜 정말 두터운 연분이라 할 만 합니다. 그러나 근년 이래로 노쇠와 병고는 날로 더욱 깊어가고, 굶주림과 추위는 날로 더욱 핍박하게 되었습니다. 한 칸의 곁방, 한 병의 간장의 구걸도 사람들은 용납해주지 않았고, 수 많은 집 문전에서의 수치는 무겁기 산더미 같습니다. 아이들이 추위에 떨고 굶주림에 지쳐 있어도 그것하나 면하게 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상황이 이러한데 어느 겨를에 부부간의 애정을 즐기겠습니까? 젊은 얼굴 예쁜 웃음은 풀잎 위의 이슬같고, 굳고도 향기롭던 그 기약도 한갖 바람에 날리는 버들가지 같구려! 당신에게는 내가 있어서 짐이 되고, 나는 당신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곰곰히 지난 날의 환락을 생각해 보면 그것이 바로 번뇌로 오르는 계단이었습니다. 당신이나 나나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뭇 새가 모여 있다가 함께 굶어죽기 보다는 차라리 짝없는 난새가 거울을 향하여 짝을 부르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순경(順境)일 때는 붙들고 역경일 때는 버리는 것이 인정의 차마 하지못할 짓이기는 합니다만, 그러나 가고 머무는 것은 사람의 뜻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오, 헤어지고 만남에는 운명이 있습니다. 바라건대 여기서 서로 헤어지도록 합시다. " 조신은 아내의 제의를 듣고 무척 반가워했다. 네 아이들을 각각 둘씩 나누어 갈라서려 할 때 아내가 다시 말했다. "나는 고향으로 갈테니 당신은 남쪽으로 가세요. " 서로 잡았던 손을 막 놓고 돌아서서 길을 나서려 할 때, 조신은 꿈에서 깨어났다. 깜짝 놀라 살펴보니 자신은 관음보살상 앞에 엎드려 있었고, 주위를 둘러보니 쇠잔한 등불은 어스름한 불그림자를 너울거리며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이튼날 아침에 보니 수 염과 머리털이 하얗게 세어 있었다. 조신은 망연히 넋이 나간 듯, 인간 세상에의 뜻이라곤 전혀 없었다. 이미 인간의 그 고된 생애에 대해 염증이 느껴짐이 마치 실제 백년의 신고(辛苦)에 시달린 것 같았다. 탐욕의 마음은 얼음이 녹듯이 없어져 버렸다. 이에 관음보살의 모습을 대하기가 부끄러워 참회를 금하지 못했다. 그리고 해현(蟹縣)으로 가서 꿈에 아이를 묻었던 곳을 파보니 그곳에서 돌미륵이 나왓다. 깨끗이 씻어서 그 부근의 절에 봉안하고, 경주로 돌아가 장원 관리 임무를 벗었다. 그리고 사재(私財)를 들려서 정토사(淨土寺)를 세우고 부지런히 선업을 닦았다. 그 후 조신이 어느 곳에서 세상을 마쳤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관음신앙 낙산에는 언제나 관세음보살이 머물고 있다. 이것을 '관음진신주처신앙(觀音眞身住處信仰)'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신앙의 배경은 『화엄경』에 있다. 『화엄경』에는 「보살주처품(普薩住處品)」이 별도로 있어서 금강산에는 법기(法起)보살, 오대산에는 문수보살, 천관산에는 천관(天冠)보살이 상주설법(常住說法)한다고 설하고 있다. 그런데 관음주처 신앙은 이 경전의 「입법계품(入法界品)」에 기초하고 있다. 선재동자(善財童子)는 28번째로 선지식(善知識)을 만나는데, 그가 곧 관음이다. 관음보살은 남방 해상의 광명산(光明山), 곧 보타낙가산에서 상주설법하고 있었는데, 선재동자가 묻는 보살도(菩薩道)에 대해 일체 중생들이 공포에서 벗어나도록 서원을 세워 대비법문광명행(大悲法門光明行)을 성취했다고 했다. 이처럼 관음진신주처신앙이 『화엄경』에 토대한 것이라고 볼 때 신라의 낙산관음진신주처신앙이 과연 의상에 의해 유포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관음의 주처가 『육십화엄(六十華嚴)』에는 광명산으로, 『팔십화엄(八十華嚴)』에는 보타낙가산으로 되어 있는데, 『팔십화엄』은 의상의 열반(서기 702년)에 가까운 699년에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타낙가산이라는 산 이름은 반드시 『팔십화엄』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646년에 쓰여진 현장(玄濱)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도 포달낙가산 산꼭대기에 천궁(天宮)이 있어서 관자재보살이 왕래하며 뵙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나타나 위유(慰喩)한다고 했다. 그리고 보타낙가산은 소백화산(小白花山)으로도 불린다. 서역의 보타낙가산은 백의대사(白衣大士), 곧 관음보살이 머무는 곳이므로 이곳에서는 '소백화'라고 한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이를 밝힌 것이다. 또한 징관(澄觀)도 여기서는 소백화라고 한다고 했다. 이처럼 보타낙가산이라는 지명은 『팔십화엄』에만 쓰인 것이 아니고, 또한 그 한역(漢譯)인 소백화산으로부터 의상이 백화도량(白花道陽)이라는 용어를 이끌어 쓴 예 등으로 볼 때, 낙산의 관음보살주처신앙과 의상스님과의 관계를 간단히 부정하기는 어렵다.

★.보타전은 낙산사 석마근 스님과 홍련암 송지홍 스님의 원력으로 1991년 7월에 시작하여 1993년 4월 10에 준공했으며, 도편수는 홍완표 거사이다. 보타전에는 한국 최초로 7관음상(천수관음, 성관음, 십일면관음, 여의륜관음, 마두관음, 준제관음, 불공견색관음)과 남께 32관음 응신상, 그리고 1천5백 관음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나무는 백두산 홍송(紅松)이요, 조각은 자광불교미술원 김광환, 김광열 형제가 2년에 걸쳐했다. 그리고 닷집(대웅전안의 부처님좌대위의 또다른 집)은 박현규 거사의 작품이요, 단청은 주인철, 김재욱 거사가 했다. 특히, 벽화는 낙산사를 창건한 해동의 화엄종주 의상대사의 일대기를 송관무, 김용대 두 화공이 그렸다. 7관음상을 봉안하던 날 밤에는 하늘에서 풍악소리가 들리는가 했더니 청학(靑鶴) 5마리가 허공으로 날아 올랐고, 때를 맞추어 동해바다는 울음을 그쳤으며, 무지개빛 서기광명(瑞氣光明)이 우주법계(宇宙法界)에 가득했다고 한다.

● 낙산사에 `부처님 진신사리
● 낙산사에서 `부처님 사리'가 확실시 되는 사리가 유물과 함께 발견돼 불교계와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특히 이번에 발견된 사리는 부처님 오신날을 앞두고 지난해 산불(2005년 4월 6일)피해를 입은 낙산사 공중사리탑(도무형문화제 제75호) 보수 과정에서 발견돼 의미를 더하고 있다. 낙산사에 따르면 낙산사 해수관음보살 남동쪽에 위치한 공중사리탑 보수를 위해 옥개석을 해체하던 중 탑신 상층부에서 사리함이 발견됐으며 개봉한 결과 사리 1과와 다수의 사리관련 유물이 발견됐다고 한다. 낙산사를 방문한 한국 불교문화계 권위자 정영호(단국대석좌교수)박사는 사리 친견후 “빛이 나는 등 사리의 형태를 봤을때 부처님 사리가 확실시 된다”며 탄성을 자아냈다고한다. 보타전내 우측에 전시하여 친견토록 배려해두었는데 사진 촬영을 못하게 하였으며 보타전을 안내 하는 보살님은 석가모니 진신사리 라고 말하였으나 진열해둔 문서등에는 그런 내용이 없었다. 지름 7~8㎜가량의 사리는 엄지손가락 끝마디 크기의 붉은색 사리호에 들어있었으며 사리호는 금으로 된 사리함(금합)에 넣어진뒤 다시 은합 동합 등의 순서로 4단계에 걸쳐 봉안돼 있었고 백색의 진주 보다 작으면서 영롱한 흰 빛을 발하고 있어 신비함을 더했다.. 또 사리함에서는 금합 은합 등을 감싼 비단포장 7기와 봉안문 1점 등 20여점의 유물이 함께 나왔는데 모두 친견하도록 전시해 두었다.  사리함이 발견된 공중사리탑은 314년전인 숙종 18년(1692년)에 건립된 것으로 사리함은 이때 공중사리탑에 봉안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낙산사 기록에 의하면 “1683년 석겸스님의 기도중에 공중에서 사리가 떨어졌다”는 내용이 전해지고 있어 이 사리는 1683년 훨씬 이전부터 낙산사에 존재했다가 이때 발견된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외침 등으로부터 사리를 보호하기 위해 법당 용마루 등에 보관하기도 했으며 침탈로 사리 보관기록이 사라져 보관 사실을 모르다 오랜 시간이 지난후 발견될 수도 있다”는 견해여서 이 사리의 낙산사 유입시기는 훨씬 오래전일 수도 있다고 했다.  낙산사 신도 등에 따르면 낙산사 공중사리탑은 50여년전부터 비스듬히 쓰러져 있는 등 이미 도굴을 당한 것처럼 보여 공중사리탑속의 사리가 수백년의 시간이 지나도록 도굴 피해를 면했던 것으로 보인다. 낙산사 정념주지스님은 “부처님 사리가 지난해의 화마도 이겨낸 뒤 이번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낙산사 뿐 아니라 모든 이들의 영광으로 받아들인다”고 했다. *,이번 답사중에는 석가모니 진신 치아사리와 공중사리를 친견하는 행운을 얻었다


낙산사 의상대
낙산사 홍련암
낙산사 보타전
낙산사 - 원통보전, 7층석탑, 사리탑, 銅鍾(동종)
낙산사 무료국수 공양실, 무료 커피
낙산사 다래헌
낙산사 - 꿈이 이루어 지는 길
낙산사 해수관음상
낙산사 사천왕상, 사천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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