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지침으로 삼을 목록 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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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블tv를 보다가 너무나도 멋진 말이여서 캡쳐...

「정답」은 언제나 문제를 응시할 때, 즉 거리를 둘 때만 나오게 되어있다. 문제를 외면하고 회피한다거나, 반대로 문제에 빠져있을 경우에는 결코 정답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삶에서 마주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는 까닭은 대부분 풀어야할 문제로부터 거리를 두는 데에 실패하기 때문은 아닐는지…. 며칠 전 무슨 일로 새벽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떠오르는 태양을 본 적이 있다. 붉다고도, 빨갛다고도 할 수 없는, 형언할 수 없이 신비한 색깔의 태양을 바라보면서 나는 난생 처음으로, 저 태양을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은 그와 내가 「떨어져 있기 때문」임을 깨닫게 되었다. 반짝이는 별, 부딪치는 파도, 멀리 있는 섬을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것도 그들과 내가 사실은 떨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태양 안에, 별 안에, 바닷물 속에 머물러 있는 상황이라면 나는 그 어느 것도 아름답게 볼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결국 「거리를 둔다는 것」은 일종의 장애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하는 것들의 본질과 가치를 더욱 소중하게 볼 수 있게 하는, 그리고 그것들을 오래도록 지키게 하는 창조적 힘임을 나는 그 새벽, 고속도로 주변 자리에서 소중히 깨달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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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587년의 유배 사건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들의 기원과 뿌리를 철저히 조망하게 했던 사건이었다. 조국과 분리되어 「거리」를 두게 되면서, 그들은 처음으로 조국과 민족이라는 화두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하였고, 억압과 박해라는 현실 속에서야 비로소 자유와 해방의 진정한 가치를 「응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이스라엘은 바빌론에 무참히 패배한 이후, 왜 그런 고통을 마주해야 하는지를 꼼꼼히 묻기 시작했고, 이에 대한 답을 과거 그들 삶에 대한 「거리」와 「응시」를 통해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찾아낸 정답은 하느님께서 몸소 삶의 현안(懸案)으로 제시하여 주신 생명의 법(율법, 계약)을 준수하지 못하고 늘 비켜서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수렴되었다.
이러한 반성은 같은 비극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기 위해 하느님의 법을 문서로 기록하여 이를 가정마다 보존하자는 대의로 모아졌다. 이것이 율법서(=토라, 혹은 모세오경)라는 사상 초유의 작품이 성문-편집되던 역사적 과정이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은 그들 신앙의 고유성과 계약 평등 공동체로의 환원을 주도하며 목숨을 아끼지 않고 외쳤던 「예언자들의 목소리」 역시 참으로 하느님의 목소리였음을 깨닫기에 이르는데, 이렇게 예언자들의 신탁들을 수집, 기록하여 완성한 책들이 구약성서 「예언서」(=느비임)였던 것이다.
이와 유사한 사건이 이스라엘 역사 안에 다시 등장하게 된 것은 서기 70년 이후였다.
로 마 제국에 의해 영원한 도읍 예루살렘이 또 한 번 초토화되면서 그들은 왜 이러한 일이 다시 일어났는지, 어떻게 하면 지혜롭게 이 난국을 헤쳐 나갈 수 있는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유배 시절 그들의 조상들이 그랬듯이 「거리」를 둔 시각을 통해 현재적 고난의 의미를 다시금 깨닫게 된 것이었다. 그 결과 90~100년경, 얌니야(=야브네 : 유다 교육의 대표적 도시)에 학자들이 모여 이스라엘이 삶의 지침으로 삼을 만한 책들의 목록을 다시금 설정하게 되는데, 이때 생겨난 목록이 「성문서」(=크투빔)부분이었고, 이렇게 「성문서」를 마지막으로 「정경」(正經, CANON), 즉 구약성서가 완성된다.
집회서는 서문에서 『율법서와 예언서와 그 뒤를 이은 다른 글들은 우리에게 위대한 가르침을 수없이 전해주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 증언은 집회서가 저술되던 당시(기원전 190~180년경), 이미 「율법서」와 「예언서」가 이미 경전의 위치에 올라 있었음을 명시하고 있는데, 「성문서」 부분은 『다른 글들』이라고 언급됨으로써 아직 정경 그룹으로는 묶여지지 못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위에서 설명된 구약성서 정경화 과정을 그대로 확증하여주는 중간 기록인 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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