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의 아들, 청년 우장춘

 



처음에는 우장춘에 대한 성공스토리인줄 알고 봤는데... 우장춘의 아버지가 을미사변에 일본인편에서 민비시해사건과 연관이 있었고, 그에 따른 우장춘의 고뇌에 대한 소설이였다.
처음에는 거짓이 아닌가하고 찾아봤더니 역사적인 실제 사건이였다고...
거기에다가 한국의 국보라고 치켜세워서 한국에 입국을 시켜놓고는 일본에 돌아가지 못하게 방해공작까지...
연좌제.. 애국심.. 정치.. 음모.. 배신.. 생존... 뭐 그런것들이 복잡하게 역여있는 참 가슴아프고, 세상살이에 대해서 적나라하게 보여준 소설이였다.

우장춘 - 감추기
우장춘(1898~1959)

세계적인 육종학자 우장춘은 인생의 마지막 시절이며, 가장 소중한 시기였던 고국생활의 첫걸음을 다소 거창하게 시작했다. 귀환동포의 행렬도 뜸해진 1950년 3월 8일 부산항 부두. 오가는 사람들 속에 다소 거창한 환영 대열이 눈에 띈다. 대형 플래카드를 내세운 것이며, 기다리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드러나는 설렘과 초조함으로 보아 예사 인물의 귀환은 아닌 듯하다. 과연 들고 있는 대형 플래카드에는 '환영 우장춘 박사 환국'이라는 글귀가 쓰여 있다. 일본에 거주하던 세계적인 육종학자 우장춘(禹長春,1898~1959)의 귀국이었다.

이윽고 한일교환선으로서 조선인 불법 체류자나 범죄자를 추방하는 강제 송환선이었던 신코마루(新興丸)가 도착하자 뱃머리에 우장춘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선인이라면 지독히 멸시하는 일본 사회였고,조선인을 추방하려는 것이 당시의 추세였다. 하지만 세계적 명성을 얻은 우장춘이기에 일본은 그를 붙잡아두려 했다. 이에 우장춘은 본적이 서울임을 내세워 불법 체류자를 자처하여,밀입국·범법 외국인을 수용하는 오오무라(大村) 수용소에 입소하는 과정을 거침으로써 강제 송환선을 타게 된 것이었다.

이후 우장춘은 그의 귀국을 추진한 '우장춘박사환국추진위원회'가 동래 온천장에 한국농업과학연구소(뒤에 중앙원예기술원,원예시험장)를 마련하자,여기서 인생의 마지막을 보낸다. 귀국 환영식장에서 '조국의 땅에 뼈를 묻겠다'고 한 그의 말처럼,우장춘은 1959년 죽을 때까지 10년 동안 줄곧 이곳에서 한국적 토양에 맞는 농법 개발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우장춘이 활동한 동래 원예시험장은 1950년대 한국 농업 개발의 산실이었다.

우장춘의 업적은 먼저 그동안 일본에 의존하고 있던 무와 배추 등의 채소 종자를 개량하여 국산화함으로써 채소 종자의 '독립'을 꾀했다. 아울러서 일본에서 수입하던 무균종서(無菌種薯,병이 없는 씨감자)를 대관령에서 재배하는 데 성공하여 한국전쟁 뒤의 식량난 해결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작물 재배에 인분뇨 사용을 금지한 '청정 재배' 방식을 보급하고,화훼원예의 발전에도 초석을 놓았다. 이외에도 많은 분야에서 농업기술을 개발하여 우리 나라 육종학의 터전을 닦았다.

그러나 널리 알려져 있는 '씨 없는 수박'의 신화는 사실은 잘못된 이야기다. '씨 없는 수박'은 이미 일본의 기하라연구소에서 개발한 것인데,다만 우장춘은 기하라연구소의 방법대로 '씨 없는 수박'을 만들어 보인 것뿐이다. '수박은 씨를 발라내며 먹어야지,'씨 없는 수박'을 무슨 맛으로 먹느냐'며 시큰둥하던 우장춘이 이를 만들어 보인 것은 '기적'을 보여주어 농정의 권위를 확보하고자 한 때문이었다. '농촌지도소가 권장하지 않는 식물을 심으면 된다'는 것이 상식이 될 정도로 농정에 대한 불신이 만연하였던 현실 상황,일껏 개발한 우량 종자라도 보급이 어려웠기 때문에 다소 자극적인 방법으로 과학의 힘을 실감케 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우장춘이 '씨 없는 수박'을 개발하지 않았다고 해서 한국 농업에 끼친 공적이 폄하될 수는 없다. 우장춘의 공적은 한갓 '씨 없는 수박'에 있는 것이 아니라,한국 육종학의 씨를 뿌린 데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공로로 우장춘은 1957년 제1회 부산시 문화상을 수상하였으며,임종 직전이었던 1959년 8월 7일에는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수상했다. 때문에 그는 '인간 국보','살아있는 문화재'로 불리며 뭇 사람들의 존경과 우러름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우장춘에 대한 평가가 찬사로만 가득했던 것은 아니다. 우장춘의 가계에 대한 노골적인 분개와 비아냥,싸늘한 냉소 또한 분명한 현실이었다. 가족,특히 우장춘의 아버지 우범선은 그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우범선(禹範善,1857~1903)은 한말의 개화파 무인으로서 일찍부터 친일 근대화를 주장한 인물이다. 1895년에 우범선은 휘하의 장병을 이끌고 명성왕후 민비의 살해(을미사변)에 참여했다. 그 후 우범선은 일본으로 망명하여 재기를 도모하던 중,1903년 독립협회 부회장을 지낸 바 있는 고영근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되었다. 이로써 고영근은 대한제국으로부터 포상되었으며,우범선은 국모 시해의 역적,친일 매국노의 오명을 쓰게 되었다.

어린 시절의 우장춘은 불우했다. 우장춘은 1898년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우범선과 사카이 나카(酒井仲)라는 일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났다. 혁명 정객으로서의 자부심과 친일 매국노라는 오명,극단적으로 상반되는 양자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것은 고스란히 우장춘의 몫이었다. 게다가 아버지가 죽은 후 어머니 혼자 꾸리는 살림은 극도로 궁핍하여 한때 우장춘은 고아원 생활을 했다. 이런 지독한 가난은 우장춘이 장성하기까지 계속되었다. 거기다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일본인 사이에서 노골적인 냉대와 보이지 않는 멸시를 받아야 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아버지의 존재에서 비롯한 천형(天刑)과도 같은 멍에,아버지의 사후 일상이 되어버린 지독한 생활고,한국인 혼혈아로서 일본인 사이에서 받아야 했던 멸시. 이중 삼중으로 중첩되는 고난은 우장춘을 세상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깊은 고뇌를 간직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자신의 출신,그에서 비롯된 고난이 우장춘을 주저앉히지는 못했다. 그의 좌우명이 되어버린 '밟혀도 꽃을 피우는 길가의 민들레'처럼,우장춘은 자신에게 가해진 현실의 질곡을 담금질의 계기로 승화시켰다. 그 결과 이루어낸 것이 다윈의 진화론에 중대한 수정을 가하였다는 '종(種)의 합성(合成)' 이론. 이로써 우장춘은 세계 유전학계에 이름을 아로새기게 되었다. 즉 한국인이며,전문학교(도쿄제국대학 부설 농학실과) 출신이라는 약점을 극복하고 농학자로서의 당당한 입지를 굳힌 것이다.

이런 그에게 조국의 부름은 나름대로 금의환향으로 여겨졌을지도 모르겠다. 우장춘은 비록 한국말을 못했지만,한국인이라는 인식은 뚜렷했던 것 같다. 일본에서 지낸 50여 년 동안 한국식 성명을 고집한 것,이제는 안정된 생활이 보장될 일본을 떠나 가족과 생이별을 하면서까지 자신에 대한 시선이 따뜻하지만은 않았을 한국행을 흔쾌히 결정한 것이 그것을 짐작케 한다. 뒷날 우장춘은 자신의 민족의식을 지탱해 준 것은 '너는 조선 혁명가의 아들'이라고 부단히 일깨워준 어머니의 가르침이었다고 술회했다. 그러나 우장춘은 어머니의 죽음에 임종조차 하지 못하였으니,그것은 그가 한국에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을 염려한 정부가 여권을 발급하지 않았던 탓이다. 다만 우장춘은 원예시험장에 생명수를 공급하는 우물에 자유천(慈乳川,자애로운 어머니의 젖이 솟는 샘)이라는 이름을 붙임으로써 자신에게 생명수와 같았던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대신했다.

올해는 우장춘이 영면한 지 43주년이 되는 해이다. 원예시험장이 수원으로 이전한 뒤,일대는 주택가로 바뀌어 이제 옛 모습은 찾을 수 없다. 다만 자유천이 있는 협소한 일대가 우장춘 유적지로 보존되어 왔는데,1999년에 자유천 뒷편으로 우장춘기념관이 건립되어 우장춘의 사적을 보존하고 있으며,그가 한국 육종학계에 남긴 발자취들을 보여주고 있다.

고난을 이겨내는 인간의 모습처럼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 비록 작더라도 그것이 역경을 헤쳐 나온 노력의 산물이라면,그처럼 소중한 것이 또 있을까. 고난과 역경 앞에 결코 좌절하지 않고 맞섰던 한 인간과 대화의 시간을 갖는 것은 작은 즐거움이 아닐까. 그를 찾아 온천장으로 나서보자. 김선미·영산대 강사

1898

日 망명개화파
우범선의 아들로 출생

1903

아버지 피살뒤 편모슬하 성장

1919

도쿄제국대 부설 농학실과 졸업,日 농림성 농사시험장 임용

1930

피튜니아꽃 육종합성 성공

1936

종의 합성이론으로 모교서 농학박사 학위 취득

1950

귀국. 부산정착. 한국농업과학연구소 소장 취임

1957

제1회 부산시 문화상 수상

1959

대한민국 문화포장  수상.
별세


우 범선(우장춘의 아버지) - 감추기
1881년(고종 17) 별기군(別技軍) 참령(參領)이 되고 개화파에 가담했습니다.

그리고 을미사변 때 훈련군 제 2대대의 대장으로써

일본군 수비대와 함께 궁궐에 진입해서 휘하장병을 이끌고

명성황후의 시해를 방조, 가담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아관파천 후에 일본으로 망명해서 일본여성과 결혼했지만

나중에 암살됐죠..

당시 네살이었던 우장춘은 고아원과 엄마 사이를 오가면서

어려운 나날을 보내게 되었구요..

자라서 자신의 피가 섞인 일본을 몹시 증오해서

직장에서 창씨개명을 요구하자 즉시 사표를 냈다고 하는군요.(이건 좀 미화된 이야기같기도 ..)


우장춘에 대한 평가가 찬사로만 가득했던 것은 아니다.
우장춘의 가계에 대한 노골적인 분개와 비아냥,싸늘한 냉소 또한 분명한 현실이었다.
가족,특히 우장춘의 아버지 우범선은 그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우범선(禹範善,1857~1903)은
한말의 개화파 무인으로서 일찍부터 친일 근대화를 주장한 인물이다.
1895년에 우범선은 휘하의 장병을 이끌고 명성왕후 민비의 살해(을미사변)에 참여했다.
그 후 우범선은 일본으로 망명하여 재기를 도모하던 중,
1903년 독립협회 부회장을 지낸 바 있는 고영근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되었다.
이로써 고영근은 대한제국으로부터 포상되었으며,
우범선은 국모 시해의 역적,친일 매국노의 오명을 쓰게 되었다.

어린 시절의 우장춘은 불우했다.
우장춘은 1898년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우범선과 사카이 나카(酒井仲)라는 일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났다.
혁명 정객으로서의 자부심과 친일 매국노라는 오명,
극단적으로 상반되는 양자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것은 고스란히 우장춘의 몫이었다.
게다가 아버지가 죽은 후 어머니 혼자 꾸리는 살림은 극도로 궁핍하여
한때 우장춘은 고아원 생활을 했다.
이런 지독한 가난은 우장춘이 장성하기까지 계속되었다.
거기다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일본인 사이에서 노골적인 냉대와
보이지 않는 멸시를 받아야 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아버지의 존재에서 비롯한 천형(天刑)과도 같은 멍에,
아버지의 사후 일상이 되어버린 지독한 생활고,
한국인 혼혈아로서 일본인 사이에서 받아야 했던 멸시.
이중 삼중으로 중첩되는 고난은 우장춘을 세상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깊은 고뇌를 간직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자신의 출신,그에서 비롯된 고난이 우장춘을 주저앉히지는 못했다.
그의 좌우명이 되어버린 '밟혀도 꽃을 피우는 길가의 민들레'처럼,
우장춘은 자신에게 가해진 현실의 질곡을 담금질의 계기로 승화시켰다.
그 결과 이루어낸 것이 다윈의 진화론에 중대한 수정을 가하였다는
'종(種)의 합성(合成)' 이론.
이로써 우장춘은 세계 유전학계에 이름을 아로새기게 되었다.
즉 한국인이며,전문학교(도쿄제국대학 부설 농학실과) 출신이라는
약점을 극복하고 농학자로서의 당당한 입지를 굳힌 것이다.

이런 그에게 조국의 부름은 나름대로 금의환향으로 여겨졌을지도 모르겠다.
우장춘은 비록 한국말을 못했지만,한국인이라는 인식은 뚜렷했던 것 같다.
일본에서 지낸 50여 년 동안 한국식 성명을 고집한 것,
이제는 안정된 생활이 보장될 일본을 떠나 가족과 생이별을 하면서까지
자신에 대한 시선이 따뜻하지만은 않았을
한국행을 흔쾌히 결정한 것이 그것을 짐작케 한다.
뒷날 우장춘은 자신의 민족의식을 지탱해 준 것은
'너는 조선 혁명가의 아들'이라고 부단히 일깨워준 어머니의 가르침이었다고 술회했다.
그러나 우장춘은 어머니의 죽음에 임종조차 하지 못하였으니,
그것은 그가 한국에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을 염려한 정부가 여권을 발급하지 않았던 탓이다.
다만 우장춘은 원예시험장에 생명수를 공급하는 우물에
자유천(慈乳川,자애로운 어머니의 젖이 솟는 샘)이라는 이름을 붙임으로써
자신에게 생명수와 같았던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대신했다.

올해는 우장춘이 영면한 지 43주년이 되는 해이다.
원예시험장이 수원으로 이전한 뒤,일대는 주택가로 바뀌어
이제 옛 모습은 찾을 수 없다. 다만 자유천이 있는 협소한 일대가
우장춘 유적지로 보존되어 왔는데,
1999년에 자유천 뒷편으로 우장춘기념관이 건립되어
우장춘의 사적을 보존하고 있으며,
그가 한국 육종학계에 남긴 발자취들을 보여주고 있다.

<도서 정보>제   목 : 그 남자의 아들, 청년 우장춘
저   자 : 이남희
출판사 : 창비
출판일 : 2006년 12월
책정보 : 페이지 330 / 504g   ISBN-10 : 8936433563 / ISBN-13 : 9788936433567
구매처 : 오디오북(KBS)
구매일 :
일   독 : 2007/3/9
재   독 :
정   리 :

<이것만은 꼭>



<책 읽은 계기>



<미디어 리뷰>
『플라스틱 섹스』 『사십세』를 발표했던 중견작가 이남희가 ‘씨없는 수박의 개발자’로 알려진 육종학자 우장춘의 생애와 인간적인 고뇌에 시선을 맞추어 쓴 장편소설. 이 소설은 그간 우리가 알고 있던 우장춘의 업적 뒤에 가려진 복잡한 가족사와 그로 인한 갈등과 번민, 그리고 해방된 조국의 농업 근대화에 앞장서기까지의 굴곡진 삶을 평전 형식으로 쓴 작품으로, 화려한 명성에 가려진 우장춘의 생애의 이면을 생생하게 되살려놓았을 뿐 아니라 20세기 초 격동의 역사가 고스란히 투영된 한 가족, 한 문제적 인간의 삶을 그려내 역사인물소설의 탄탄한 성취를 보여준다.

저자 : 이남희
1958년 부산 출생. 충남대 철학과 졸업.1986년 『여성동아』 장편 공모에 『저 석양빛』이 당선되어 작품활동 시작. 역사적 전망과 환경 문제, 지난 연대의 고통스러운 기억, 좌표를 잃고 방황하는 현대인의 자화상 등을 밀도 있게 그려냈다. 소설집 『지붕과 하늘』(1989), 『개들의 시절』(1991) 『사십세』(창작과비평사 1996) 『플라스틱 섹스』(창작과비평사 1998)과 장편소설 『바다로부터의 긴 이별』(1991), 『소설 갑신정변』(『저 석양빛』 개제, 1991), 『산 위에서 겨울을 나다』(1992), 『사랑에 대한 열두 개의 물음』(1993), 『음모와 사랑』(1994) 『그 남자의 아들, 청년 우장춘』(창비 2006) 등이 있음.


<줄거리>



<책속으로>
프롤로그 1953년 부산

1. 1903년 일본 쿠레
2. 아이들은 어떻게 사귀는가
3. 센진노꼬(鮮人の子)
4. 토오꾜오, 희운사
5. 허약한 소년
6. 기선(汽船)아, 나도 데려가다오
7. 1916년, 토오꾜오
8. 칸다의 남명구락부
9. 20세기 청년백서
10. 음치
11. 한여름밤 히비야의 폭동
12. 백합 같은 그녀
13. 두 번이나 경고를 받다
14. 그 전날 밤
15. 태풍 속에서
16. 샹하이로 가는 길
17. 암살자와 마주쳐
18. 적의 심장부에서 독립을 외치다

에필로그 작은 연꽃: 우장춘 죽기 육년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