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왕십리(往十里)의 지명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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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조 이성계의 부탁으로 새로운 도읍지를 찾기 위해 한양에 도착한 무학대사는 한강을 건너자 넓은 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사방으로 지세를 자세히 살핀 무학은 그 곳이 바로 새 도읍지라고 생각하고 흐뭇한 마음으로 잠시 쉬고 있었는데, 소를 몰던 한 노인이 "이 놈의 소는 미련하기가 꼭 무학(무학대사의 이름과 음이 같음) 같구나. 왜 바른 길로 가지 않고 굳이 굽은 길로 들어서느냐?"는 말을 듣고 노인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새로운 도읍지가 어떤 곳인지 물었다.
그러자, 노인은 채찍을 들어 서북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서부터 10리를 더 가시오." 무학대사가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순간, 노인과 소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고 대사는 가벼운 걸음으로 서북쪽을 향해 10리쯤 걸었다. 그 때 도착한 곳이 바로 지금의 경복궁 근처였다. 그로부터 노인이 무학대사에게 10리를 더 들어가라고 일러 준 곳은 갈 '왕(往)'자와 십리(十里)를 써서 '왕십리(往十里)'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도 친구와 세검정, 홍제동, 낙성대 등의 유래를 이야기하다가 나온 이야기인데,
혹 내가 잘못 알고 있나 싶어서 다시 찾아봄...

서대문구 홍제동의 동명 유래 - 홍제원(弘濟院), 환향녀(還鄕女)
낙성대(落星垈)역 이름의 유래는?

친구는 이쪽 지역이 조선시대에 궁궐에서 왕이 먹는 채소를 재배하는것에서 이름이 유래했다고 하던데,
그런건 아니고 그냥 지금의 농수산물 시장같은 물류 집결지였다고...

길음동은 미아리 고개 너머 형성된 작은 마을이었다. 일제 강점기엔 공동묘지로 쓰였다. 1950년대 후반 이후 이농민·수재민·철거민 등이 몰려들어 대표적인 달동네가 됐다.

왕십리는 조선시대 사대문 안으로 들여가는 채소 등이 집결하던 물류의 중심지였다. 씻고 남은 채소 부스러기로 해장국을 끓여 파는 식당도 생겼다. ‘왕십리 똥파리’라는 별명이 붙은 건 1930년대 부설된 기동차(汽動車)에 새까맣게 똥파리가 들러붙은 것에서 비롯됐다. 기동차가 비료로 쓸 인분을 싣고 왕십리를 통과해 뚝섬 채소재배지로 향했던 게다.

“왕십리 토박이 말씀이, 인분 저장소는 동대문구 용두동에 있었대요. ‘왕십리 똥파리’가 아니라 ‘용두동 똥파리’여야 하는데 억울하다는 거죠.” (서울역사박물관 김상수 학예연구사)

왕십리 기동차는 60년대에 사라졌고, 70년대에는 임대료 싼 한옥을 개조한 가내공장지대가 조성됐다. 길음동에는 공동묘지를 건드리기가 싫어 산과 암반을 깎아 지은 집들이 독특한 형태의 도시 공간을 만들어냈다. 아현동엔 일제시대 토막촌(낮은 지붕이 이어지고 천막을 친 주거지)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국가 주도로 계획해 정비한 도시가 아니라, 되는대로 집 짓고 살았기에 미로처럼 복잡하면서도 거미줄처럼 자연스럽게 골목과 담벼락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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