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PD수첩 - 민간인 사찰 의혹, 아직 풀리지 않았다, 목포 축복동 살인사건, 내가 정말 사람을 죽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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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 사찰의혹은 드디어 검찰로 넘어갔는데, 과연 검찰이 이번 사건의 몸통을 밝힐수 있을지.. 과연 그러할 의지가 있을지... 결국 특검으로 넘어가는것은 아닌지 모르겠는데, 제대로 밝히지 못한다면 MB정권의 비리 게이트로 오명을 남기지 않을까 싶다.
오늘 뉴스를 보니 영포회문제에 이어서 한국노총 간부미행, 선진국민연대의 국민은행장 인사개입 등이 계속 터져나오는데, 어디까지 줄줄이 나올지...-_-;;

전라도 목포 축복동 살인사건은 술먹다가 술에 취해서 친구와 싸워서 친구를 죽였다는 살인죄로 구속됬지만, 알고보니 위증으로 엉뚱한 사람이 잡혀간듯 한데, 결국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는데, 경찰과 검찰의 수사의 문제점이 들어났지만, 이후의 범인을 잡는것에 대해서 처음의 주장을 바꾸려고 하지않고, 버티고, 종결하려는 모습...
과연 국민은 위한 검찰, 경찰인지... 자신들의 안위와 MB정권을 위해서 일하는지 참 안타까울뿐이다..


민간인 사찰 의혹, 아직 풀리지 않았다
“정치권력에 아부하기 위해 힘없는 국민의 밥줄까지 끊어버리는 공권력을 고발합니다”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민간인 사찰 의혹 국무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은 공직자, 공기업 종사자들의 비리를 암행 감찰 하는 기관이다. 지난 5월 한 민간인이 이 기관에 의해 감시와 사찰을 받고 경찰, 검찰 의 수사를 받았다는 제보가 PD수첩 제작진에게 전달됐다. 제보자는 공직과는 아무 런 상관이 없는 민간인이었다. 왜 수사권도 없는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원관실은 그 를 사찰하고 수사했을까? PD수첩에서는 2달여간의 취재를 통해 정부의 민간인 사 찰 전모를 공개한다.

▶감찰대상이었던 김종익씨, PD수첩 독점취재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이 사찰한 사람은 전직 은행원 김종익씨. 그는 국민은 행에서 2005년 명예퇴직한 후 국민은행의 하청업체인 뉴스타트 한마음의 대표로 일 하고 있었다. 30여 년간 성실한 은행원, 중소기업의 대표로만 살았던 김종익씨. 그랬 던 그가 정부로부터 받은 고초를 알리고자 PD수첩을 찾았다. 그는 단독 인터뷰에서 “한 개인의 삶을 파괴하는데 동참한 국무총리실의 고급 공무원들을 고발합니다. 이 런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든 대한민국 정부를 고발합니다”라며 자신의 참담한 심정 을 밝혔다.

▶공직윤리지원관실, 민간인 김종익을 수 개월간 사찰하다. 2008년, ‘쥐코’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동영상이 인터넷 상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이 명박 대통령의 BBK와 전과(前科)문제,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협상, 의료민영화 정 책 등에 대해 비판하는 내용으로 200여만 명의 네티즌이 접속한 동영상이었다. 그러 나 이 동영상으로 인해 경찰의 조사를 받은 사람은 단 한 사람, 김종익씨였다. 김씨는 2008년 9월 후배인 국민은행 노무팀장으로부터 충격적인 말을 듣는다. 김종 익씨가 블로그에 ‘쥐코’영상을 링크했다는 이유로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에 서 그를 조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더 놀라운 건 이들이 수개월 전부터 김종익씨를 감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김씨의 회사에 하청을 주던 국민은행을 통해 압박을 가했다. 국민은행 부행 장 남경우를 불러 김종익씨를 조치하라고 압력을 행사했다. 이에 국민은행 간부들 은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별도의 회사를 만들어 하청을 주겠다’며 김씨의 회사대표 직 사임과 주식 이전을 강요했다. 공직윤리지원관실 직원들이 직접 김씨의 회사를 찾아 회계 관련 자료들을 강제로 회수해 가는가 하면, 김종익씨 회사 직원들을 국무 총리실로 불러 취조하기도 했다. 결국 김씨는 대표이사직을 내놓고 자신이 보유한 주식을 처분해야 했다. 공직윤리지원관실은 자신들이 확보한 자료를 토대로 경찰에 이 사건을 이첩한다. 공금횡령과 대통령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를 가진 피의자로 경찰조사를 받은 김종익 씨. 결국 이 사건은 검찰까지 송치되어 2009년 10월 기소유예 처분을 받는다.

▶국무총리실 내사문건을 통해 본 사건의 내막 PD수첩은 김종익씨 사건의 수사기록 내용 일체를 입수, 공개한다. 먼저 국무총리실 이 동작경찰서에 직접 보낸 공문에는 김씨를 조사해야 하는 이유와 혐의들이 구체적 으로 나타나 있었다. 심지어 사찰의 압박으로 인한 충격으로 김씨가 일본에 칩거해 있을 당시의 일본 내 연락처까지 파악한 상태였다. 전방위 수사가 이뤄진 것이다. 국무총리실장(장관급) 명의의 공문이 경찰청도 아닌 일선 경찰서에 직접 전해지는 것 자체가 유례없는 일이었다. 동작경찰서의 담당 경찰은 제작진에게 공직윤리지원 관실 직원이 찾아와 수사를 의뢰했고 이후 수사는 공문에 따른 것이었다고 증언했 다. 공문에는 김씨가 실제로는 활동조차 하지 않은 “노사모 핵심 멤버”라 설명하고 있었 다. 경찰은 이에 따라 김씨와 김씨 회사의 관계자들을 불러 김씨가 노사모의 핵심멤 버인지, 김씨가 촛불집회에 자금지원을 했는지 여부를 두고 집중 추궁한다. 김씨의 고향이 강원도 평창이라는 사실 또한 사건의 핵심이었다. 바로 참여정부 핵 심인사였던 이광재 전(前)의원과 같은 고향이었던 것. 취재 결과 김씨 외에도 참여정 부 인사들을 후원했던 일반인들이 뚜렷한 혐의 없이 경찰, 검찰의 조사를 받은 것으 로 밝혀졌다. 이 전(前)의원과는 일면식도 없는 한 개인이 그와 동향이라는 이유만으 로 정부의 집요한 수사의 표적이 된 것이다. 김종익씨는 인터뷰에서 “노사모면 어떻 고, 촛불집회에 나가면 또 어떻습니까. 이광재를 후원했으면 또 어떻습니까. 그것과 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저를 이렇게 했다면, 실제로 그랬던 사람들에게는 도대체 어 떻게 했겠습니까?”라며 분노했다. 정부의 사찰과 수사로 인해 김종익씨는 모든 것을 잃었다. 30년 간 일했던 은행의 동료들, 명예퇴직 후 제2의 삶을 시작했던 사업체의 모든 지인들은 그와의 연락을 끊었다. 모든 사회활동을 접은 그는 지금 정치적 실직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청와대는 이 사건을 인지하고 있었다? PD수첩의 취재과정에서 청와대가 이 사건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상황이 포착되었 다. 김종익 씨는 기소유예처분을 받은 후 자신의 억울한 사연을 풀기 위해 헌법재판소 에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그 후 청와대의 한 행정관이 김 씨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청와대도 이 사건을 인지하고 있다고 밝힌 그는 김씨에게 헌법소원을 제출한 이유 를 물었다. 전화를 한 그 행정관은 청와대 법무비서관 소속이었다.

▶국회 회의 도중 도망친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 PD수첩이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에 이 문제에 관한 입장 표명을 요구했지 만 어떠한 대답도 듣지 못한 상황. 이에 제작진은 2명의 국회의원에게 자료를 제공했 고, 지난 6월 21일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책임자에게 질의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 런데 PD수첩 카메라를 본 이인규 공직윤리지원관은 회의 도중 자리를 빠져 나갔고 대정부질문을 하던 정무위 회의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PD수첩은 회의장 을 빠져나오는 이인규 공직윤리지원관을 포착,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그는 필사적으 로 택시를 타고 어디론가 바삐 가버렸다. 그가 PD수첩의 취재를 거부한 이유는 무엇 일까?

축복동 살인사건, 내가 정말 사람을 죽였나요?
술에 취해 친구를 죽였다. 목격자도 있다! 하지만 그와 그의 가족들은 모든 것이 누 명이라고 주장한다. 진범은 따로 있다는 것. [PD수첩]에서 2007년 8월 5일 일어난 목포 축복동 살인사건의 재구성을 통해 이 사건의 조작•은폐의혹을 취재했다.

▲ 내가 정말 사람을 죽였나요? 2007년 8월 5일 직장동료 사이인 정씨와 유씨는 술을 마시고 길을 가다 A양과 그녀 의 남자친구 B와 시비가 붙는다. 그 와중에 유씨가 사망한다. 범인으로 지목된 사람 은 동료인 정씨. 그가 동료 유씨를 상대편으로 ‘오인’하고 돌려차기로 머리를 때려 사 망에 이르게 했다는 것이다. 유력한 증거로 나온 것은 싸움을 했던 상대방인 A와B 의 증언 그리고 싸움을 말리러 나왔다고 하는 C씨의 증언이었다. 만취상태라 기억 이 전혀 없었던 정씨는 경찰의 추궁에 죄를 인정한다. 결국 그는 2008년 1월 상해치 사혐의로 5년 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사건 이후부터 사건현장 주변 동네에서 억울 한 사람이 범인이 됐다는 소문이 퍼졌다. 게다가 사건을 처음부터 본 목격자가 있다 는 얘기도 나왔는데...

▲ 축복동 살인사건, 그 날 무슨 일이? 범죄의 재구성 상식적으로 친구를, 그것도 만취상태에서, 돌려차기로 쓰러뜨려 죽음에 이르게 했다 는 것이 납득 가능한가? 정씨는 구치소에서 억울한 심정을 가족들에게 털어놓았다. 가족들은 사립탐정 원린수 씨의 도움을 빌리기로 했다. 그 역시 억울한 옥살이를 한 경험으로 사립탐정이 된 사람이었다. 그는 정씨 가족의 사연을 듣고 목포 사건현장 에 내려갔다. 처음 원소장이 사건현장을 방문했을 때, 동네주민들은 모두 사건에 대 해 이야기하기를 꺼렸다. 그는 17일 동안 50명이 넘는 사람들과 만나며 그들을 설득 했다. 그리고 극적으로 목격자 6명을 찾아냈다. 그 중엔 사건을 처음부터 1시간 넘 게 보았다는 이도 있었다. 새로운 목격자들의 증언은 A,B,C 세 명의 이야기와는 전 혀 달랐다. 첫째, 유씨를 발로 찬 것은 다른 사람이었다는 것. 둘째, 싸움이 일어난 시각이 세 명이 말한 새벽 4시경이 아닌 새벽 2시경이라는 것.. 더구나 세 명의 목격 자 A,B,C의 증언끼리도 서로 엇갈렸다. 특히 정씨가 유씨를 돌려차기하는 모습에 대 한 A와 C의 증언은 정반대였다. 정씨의 자백엔 경찰의 유도심문 의혹이 제기됐다. 사건 초동수사단계에서 여러 석연치 않은 점들이 발견됐다. 제작진은 이를 묻기 위 해 당시 사건을 맡았던 경찰과 검사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하지만 그들 모두 사건에 관해 언급을 회피했다. 수소문 끝에 만난 A,B씨 역시 모든 혐의를 부인할 뿐인데... ▲ 진범은 어디에? 정씨는 2008년 1심에 대해 항소했다. 항소심에서 새로운 목격자들의 증언이 받아들 여져 이 후 정씨는 무죄판결을 받고 2009년 9월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무죄판 결을 받은 이후 원소장은 검찰에 A,B,C를 상해치사와 위증혐의로 고발한다. 죽은 유 씨 유가족 측 또한 재조사를 요청했다. 대법 무죄확정 후 9개월여, 재조사는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을까? 과연 사건의 진실은 무엇인가? [PD수첩]에서 축복동 살인사건의 전모를 밝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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