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평구 불광동 (恩平區 佛光洞)

 
불광동(佛光洞)에는 오래전부터 옛날의 역참이 있었고 불광동에서부터 녹번동과 대조동의 사이를 따라 역촌동으로 흐르고 있는 연천(불광천 상류)이란 조그만 시내가 흐르고 있다.

1여기에 지금도 불광동쪽의 상류에 『연서』시장이 있고 하류쪽에는 녹번동,대조동 등의 동명 대신에
연천에서 유래된 『연신내』로 통하고 있다.

1인접지역으로는 동쪽에 종로와 구계를 이루면서 구기동과 접해 있으며 1980년 진흥로가 개통되어 종로
성북방향으로 가는 교통편이 좋아졌고, 한편 도심지로 집중하는 많은 교통량을 분산시키고 있으며, 남쪽에는 녹번동과 홍은동이 각각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서쪽에는 대조동과 갈현동이 통일로를 사이에 두고
길을 따라 길게 이웃해 있다. 여기의 길 동편은 불광동이고 길 서편은 대조,갈현동이다. 길을 경계로 지역이
구분된 것이며, 북쪽에 진관외동이 있다.

11973년 1·2동으로 분리되고 1985년 불광2동이 불광2동과 불광3동으로 각각 분동된후, 2008년 6월 불광1·2·3동이 불광1·2동으로 통합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불광동 관내 옛 지명을 알아보면 독바위골, 수리봉, 돈노리, 연신내, 어수물터(어수정), 이감수, 밥할머니묘소, 관터고개, 세뿔간, 새장골(사정동), 박석고개 등이 있다.도시기반 시설취약으로 인한 재개발재건축, 주거환경 개선사업 등 불량주택 개량사업이 지속적으로 추진되는 지역이며 대단위 아파트 단지, 단독주택과 독박골등 고지대 주민은 근로자등 저소득 계층의 지역으로 분류할 수 있다.

1수려한 주변환경으로 국립보건원,국립환경 연구원,한국보건사회 연구원등 국가기관이 산재되어 있다.

불광동이라는 지명은 이 근처에 바위와 대소 사찰이 많아 부처의 서광이 서려있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불광동 지역에는 북한산 자락을 중심으로 지금도 여러개의 사찰이 자리잡고 있다.
 불광동은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북부 연은방(城外) 불광리계(佛光里契)에 속한 불광리, 사정동(射亭洞), 관동(館洞), 전석동(?石洞)을 포함하였다. 영조때 작품인 겸재 정선(鄭?)의 『도성대지도(都城大地圖)』나『조선장안지도(朝鮮長安地圖)』에 이미 불광리계라는 지명이 기재된 것으로 보아, 이미 이시기 이전에 불광리계라는 지명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11년 4월 경성부가 5부(部) 8면(面)으로 편제되면서 은평면에 속하게되었다. 이후 1914년 4월 1일을 기하여 전국의 부(府), 군(郡)을 통폐합하면서 은평면 지역은 경기도 고양군으로 편입되었다.
 1949년 8월 14일 서울에 편입되어 서대문구(은평출장소)의 관할이 되었다.
 1955년 지방자치법 동제(洞制)가 실시되면서 불광동은 대광동사무소 관할하에 편입되었다가 1970년 불광1동, 물광2동사무소가 설치되었다.

옛지명
전석동(?石洞)-현 불광동 331번지 일대, 전석현(?石峴), 속칭 박석고개를 낀 마을이름이다. 통일로에서 갈현동과 불광동을 양편에 끼고 구파발로 넘어가는 고개가 바로 예부터 박석고개라고 불리웠던 곳이다. ‘전석(?石)’ 즉 ‘박석’의 유래에 대해서는 세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첫째는 고개 주변에 궁실(宮室)의 전답이 있었기 때문에 궁전(宮田)에 오가는 높은 사람이 땅을 밟지 않게 하기 위해 돌을 깔았던 것이 그대로 박혀 있어 박석고개가 되었다는 이야기이고, 둘째는 이 고개가 서오릉(西五陵)으로 이어지는 풍수지리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기 때문에 지맥을 보호하기 위하여 돌을 깔았기 때문에 박석고개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셋째는 예전 이 고개는 중국 사신의 내왕로였는데, 고갯길이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로 통행에 불편을 겪게 되자, 조정에서 이 고개에 길을 닦고 상석(床石) 크기의 돌을 깔았기 때문에 박석고개가 되었다 한다. 고개 마루 왼편에 성황당이 있었는데, 중국 사신이 이곳을 지날 때 성황당 앞에서 절을 하지 않으면 말발굽이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사정동(射亭洞: 새장골) - 불광2동 연신내 세종예식장 부근의 옛 지명으로 예전 이곳에 활터가 있어 사정동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지금의 연서로에 연서천이라는 내(川)가 있었으며, 연서천을 사이에 두고 지금의 연천초등학교 근처에 활을 쏘는 과녁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관동(館洞) - 불광2동 은혜초등학교 부근 아미산 기슭에 있던 마을이름이다. 관동(館洞)이라는 지명은 이곳에 역(驛)이 있었기 때문에 생겨난 이름으로 여겨진다. 벽제관(碧蹄館)의 경우처럼 관(館) 역시 예전에는 교통을 위한 숙박시설을 가리키는 용어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어수물터(御手井) - 불광동331번지 일대, 현 은혜초등학교 부근에 있었던 우물의 이름이다. 조선시대 숙종이 어느 날 이곳을 지나갈 때 이곳 우물에서 물을 드셨다 하여 어수정(御手井)이라 전하여 왔으나, 이곳에 살던 처녀가 떠주는 물을 받아드실 때 처녀의 손을 잡았기 때문에 어수정이라 하였으며, 이 처녀가 바로 장희빈이었다는 이야기기도 있다.
독바위골 - 불광동 산42번지, 280번지 일대에 예전에는 돌이 많아서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줄여서 독박골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인조반정 당시 일등공신이었던 원두표 장군이 거사 직전까지 이곳에 있던 바위에 숨어 지냈는데, 이후 원두표 장군의 덕을 기리기 위해 이 바위의 이름을 덕바위로 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돋노리 - 불광동 산 42번지 일대는 이곳 산봉우리에서 해가 제일 먼저 돋는다고 하여 돋노리라는 마을이름이 유래하였다고 한다. 일설에는 수리봉 아래 이 마을은 뒷산이 높고 으슥하여 산돼지가 많이 내려왔으므로 돈(돼지)놀이터가 되어 ‘돈노리’한자로는 저서리(猪?里)라 불리다가 와전되어 ‘돋노리’가 되었다고도 한다.
샛불광리-불광3동 55번지 일대, 현 연천중학교 부근의 옛지명으로 대불광리(지금의 불광2동)에 비해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조그마한 불광리라는 뜻에서 샛불광리라고 하였다고 한다.
군수모탱이 - 연신내에서 구파발 방향의 박석고개쪽으로 가다가 현 농협 뒤쪽(불광동484-70호 부근)에 있는 지명이다. 이곳은 옛날 어느 군수(郡守)의 묘가 있었다 하여 군수모탱이라 불렀다고 한다.
차돌배기 - 불광동 484번지 부근, 군수모탱이에서 박석고개로 가는 중간, 후미길에 있던 지명인데, 산부리가 튀어나온 후미진 곳에 차돌이 많이 박혀 있어 차돌배기라 불렀다고 한다.
연신내- 불광동 1번지, 연신내는 조선시대 이곳에 있었던 연서역(延曙驛:혹은 迎曙驛) 주변을 흐르던 연천(혹은 연서천)이라는 개천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일설에 따르면 인조반정 당시 반정의 주도 인물 중의 하나인 장단부사 이서(李曙)가 미리 약조한 혁명군의 집결지인 홍제원에 도착이 늦어지자 인조가 몸소 연서역까지 가서 기다렸으나, 이서의 지원군이 나타나지 않았다. 인조가 천운이 따르지 않는다 하여 실망하고 있었는데, 이때 이서가 7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혁명군에 합류하였다. 이에 반정 성공 후 인저가 이서를 향하여 “너는 이서가 아니라 연서(延曙:지각한 李曙)”라고 놀렸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신하를 늦게 만난 개천이라 하여 이 개천을 연신내(延臣川)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본래 연서역의 또 다른 이름이었던 영서역(迎曙驛)에서 인조가 친히 이서(李曙)를 맞이하게[迎] 되어 이름 그대로 ‘영서(迎曙)’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연서역은 현 인신내사거리 범서표핑 인근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해설:恩平區誌



2009/04/10 - [자료 iN/상식 iN] - 불광동과 독박골(독바위골)의 유래
2009/04/24 - [Feel 통/추억 iN] - 북한산 등산시 불광동 불광사는 두 곳



갑자기 생각이 나서 찾아본것인데, 위의 지도에 불광사에서 조금 걸어내려오다가 보면 근처에
묘지인지, 커다란 릉이 하나 있었던 기억이....
왕릉은 아니였을테고... 도대체 뭐였지...-_-;;

지금은 재개발이 되서 흔적도 없고, 생각해보니 재개발 이전에 사라진듯...
이걸 어디서 찾아봐야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