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성 - 다시뛰는 두개의 심장 (사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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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01 - [독서 iN] - 멈추지 않는 도전

예전의 그의 책을 보고나서 참 대단한 선수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오래간만에 그에 대한 다큐를 보다보니 또 가슴이 벌렁벌렁할 정도로 뜨거운 열정을 느끼게 해주었던 방송...






MBC ESPN 연말특집 EPL 박지성을 기다리며

공차는 걸 워낙 좋아했던 '미키마우스' 박지성(24)은 수원 세류초등학교 4학년 때 축구 선수의 길로 들어섰다.

지금도 건장한 체구(175㎝ 70㎏)는 아니지만 안용중을 거쳐 수원공고에 입학할때까지도 체격은 여전히 작았다.

이학종 수원공고 감독은 "박지성에게 1학년 때까지는 공을 가지고 노는 수준의 가벼운 훈련 정도만 시켰다"고 한다.

심한 훈련이 성장에 장애가 될까봐서였다.

이 감독은 "충분히 쉬고 많이 먹게 하려는 배려 차원에서 집에 자주 보냈더니박지성의 아버지가 '축구를 그만두게 하려는 게 아니냐'고 걱정스럽게 물어왔을 정도"라며 당시를 회상한다.

이 감독은 박지성에 대해 "지능적이고 발전 속도가 빨랐다.

무엇보다 축구에 대한 열정이나 욕심이 남달랐다"고 말했다.

박지성은 초등학교 6학년 때 한해 동안 가장 빼어난 활약을 보인 선수에게 주는'차범근 축구상'(5회)을 수상하기도 했지만 고교를 졸업할 때엔 그의 왜소한 체구때문에 눈길을 주는 대학팀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의 잠재력을 잘 알고 있던 이 감독의 추천으로 명지대에 진학했다.

현재 포천축구센터 총감독을 맡고 있는 김희태 당시 명지대 감독은 "처음에 입학했을때는 정말 유소년이나 다름없었다"며 "하지만 경기를 치를 수록 발전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구력이 좋고 상황 판단 능력이 탁월했다"고 전했다.

박지성은 대학 1학년 때인 99년 3월, 당시 허정무 감독이 이끌고 있던 올림픽대표팀에 합류했다.

한달 전 박지성이 올림픽대표팀과의 몇 차례 연습경기에서 좋은활약을 보였고 김 감독은 허 감독에게 그의 발탁을 권했다.

처음엔 연습생 정도로 테스트를 해 보겠다던 허 감독은 결국 박지성을 정식 멤버로 발탁했다.

체구도 작고 별 특징도 없는 선수를 왜 뽑느냐는 말도 많았지만 크게 될 선수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박지성은 대학 1학년을 마치고 2000년 일본 프로축구 교토 퍼플상가로 진출했다.

박지성의 기량이 꽃을 피우기 시작한 건 지난 2002년 한.일 월드컵 때다.

포르투갈과의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결승골을 터트리는 등 박지성은 축구팬들에게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어 그해 J2의 교토 퍼플상가를 1부리그로 올려놓은 박지성은 히딩크 감독의부름을 받고 2003년 초 네덜란드 PSV 에인트호벤에 입단, 빅리그 진출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리고 2년 6개월 만에 한국인 최초의 프리미어리거로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박지성의 어머니는 박지성을 임신했을 때 용 한마리가 자신의 목을 감고 승천하는 태몽을 꿨다고 한다.

박지성이 한국 축구사에 길이 빛날 쾌거를 이룰 것이라 마치 예견이라도 한 듯



맨유 입단으로 전세계 축구 팬의 주목을 받는 박지성과 아버지 박성종

“축구로 대학만 들어갔으면 했는데… 맨유에서 제의가 왔을 때는 지성이나 저나 믿기 힘들었어요. 황당했죠”



맨유 입단으로 세계를 놀라게 한 축구선수 박지성. 그의 뒤에는 묵묵히 뒷바라지를 하는 아버지 박성종씨가 있다. 아들 뒷바라지를 위해 영국 출국을 앞두고, 그에게서 박지성과 가족 이야기를 들었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관심이 부담스러운 듯, 대부분 인터뷰 요청을 거절하고 있다.



최초의 프리미어리거 아들 때문에 유명세 치르고 있어

장면 하나. 그에게 날아온 볼을 가슴으로 트래핑한다. 수비수 한 명이 그의 슛을 막기 위해 앞으로 달려 나왔다. 트래핑 한 볼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그의 오른발은 볼을 수비수의 머리 위로 튕겨낸다. 순간 방향을 못 잡은 수비수를 앞에 두고, 날린 강력한 왼발 슛. 그의 발을 떠난 공은 골 네트를 향해 날아갔다. 한국인 어느 누구도 세계적인 축구 강호 포르투갈을 이길 것이라고 섣불리 예상하지 못했다. 2002 월드컵, 한국과 포르투갈과의 경기는 새로운 스타 탄생의 전조였다.



장면 둘. 세계 최강의 축구 클럽팀이 모인다는 2005 유럽 챔피언스리그 4강 2차전. 네덜란드 PSV에인트호벤과 세계적인 축구클럽 AC 밀란전. 전반전 시작한 지 9분, 왼쪽 날개 공격수로 출전한 그 선수가 동료 공격수에게 패스. 문전 앞에서 공격수와 수비수가 뒤엉켰다. 그 선수는 문전으로 쇄도해 골 네트를 흔들었다. 마치 벼락 같은 슛이었다. 관중을 향해 그는 환호성을 더 이끌어내는 듯한 골 세레모니를 선보였다. 한국인 최초로 챔피언스리그에서 골을 넣은 선수라는 기록을 남기는 순간이다.



지칠 줄 모르는 체력과 몸을 아끼지 않는 투지, 뛰어난 발재간과 경기장 전체를 볼 줄 아는 넓은 시야. 그라운드를 휘저으며 상대 선수의 허를 찌르는 패스와 슈팅까지. 그라운드를 질풍노도처럼 뛰어다니는 모습은 중원의 지략가이자 해결사처럼 보인다. 그의 모습은 축구종가 영국의 축구 팬들까지 매료시켰다.



어느 누구도 상상하기 힘들었고, 실현될 것이라고 믿지 못하던 일이다. 한국선수 최초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거로 기록을 남기게 된 박지성(24). 한국은 물론, 세계의 축구 팬들을 놀라게 한 ‘쇼킹’한 소식이었다.



2002년 월드컵 4강의 신화를 등에 업고 이후 한국의 축구선수들이 해외로 진출했다. 축구 팬들은 해외로 진출한 선수들의 활약상을 기대했다. 박찬호, 박세리, 박지은 등이 뛰어난 성적으로 위상을 떨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세계 축구의 벽은 높기만 했다. 해외 진출 선수들이 적응에 실패하고,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한 채 한국으로 유턴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역시 한국 축구는 아직 멀었다’라는 자괴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월드컵 4강 신화는 그냥 이대로 묻히는가 싶었다.



하지만 축구 팬들을 환호하게 하는 소식이 네덜란드에서 날아오기 시작했다.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에인트호벤의 박지성과 이영표였다. 두 선수의 발끝에서 터져 나오는 골과 신기한 드리블은 에인트호벤을 네덜란드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유럽의 최강 축구 클럽팀이 모여서 진정한 영웅을 가리는 유럽 챔피언스리그에서 에인트호벤은 4강에 진출했다. 박지성의 투지와 이영표의 성실함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더욱 벅찬 것은 한국 축구선수 최초로 박지성이 챔피언스리그에서 득점을 한 것. 박지성의 멋진 세레모니 장면은 세계에 타전 됐다. 연이어 박지성 선수는 세계적인 명문 축구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입단 제의를 받게 된다. 박지성은 이제 한국 축구선수가 아닌 세계적인 선수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이다.



박지성 선수가 만들어낸 신화를 보고 빙그레 웃는 사람이 또 한 명 있다. 언론에는 극도로 노출되기 싫어하는 아버지 박성종씨(47)가 그 주인공이다. 박지성 선수의 맨유 입단 이후 수원의 집으로 기자들이 쉴 새 없이 찾아오고 있다. 기자들을 피하느라 거의 전화도 받지 않고, 외출도 삼가고 있을 정도다. 박지성의 인기만큼이나 박성종씨 역시 유명세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박성종씨는 “영국으로 가기 전에 마지막 인터뷰가 될 것 같다”며 기자와 만났다.



어렸을 때부터 ‘개구리’로 아들 체력 보강

박성종씨는 얼마 전 함박 웃음을 지었다. 지난 7월 12일 압구정동의 한 모발센터에서 3천가닥의 자가모낭이식 수술을 받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뒤쪽 머리카락을 앞쪽으로 이식하는 수술인데 박지성의 제안으로 이뤄졌다.



“머리숱이 많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머리카락 빠지는 게 엄청난 스트레스거든요. 수술을 받고 난 후에는 마음이 편해졌죠. 이식한 모발은 평생 빠지지 않는다고 하거든요. 또 수술을 받을 것인가는 아직 결정 하지 않았는데, 안 받아도 될 것 같아요. 지성이한테 고맙죠.(웃음)”



박지성 선수가 축구를 시작한 것은 수원산남초등학교 3학년 말이었다. 그런데 팀이 1년 만에 해체되고, 코치 선생이 세류초등학교로 가시면서 재능을 보이는 박지성을 데리고 갔다. 당시 집에서 세류초등학교까지는 버스로 30분 거리였다. 어린 나이에 버스를 타고 학교를 왔다갔다 하는 것은 힘에 부치고 피곤한 일이었다. 아침마다 책가방과 축구용품을 스스로 챙기면서 6개월을 다녔다. 집에 와서 피곤에 쓰러져 자는 아들을 보는 부모의 마음도 많이 아팠을 것이다. “저러다 말겠지!”라는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간 것.



박성종씨는 아들이 축구를 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축구로 먹고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부 열심히 해서 남들처럼 대학 가고 취직하는 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 아버지와 아들은 축구 때문에 의견 대립이 많았다. 중간에 있는 어머니 장명자씨가 두 사람의 관계를 회복시켜줬다.



“지성이는 원래 야구를 좋아했어요. 그런데 축구에 재미를 붙이니까 못말리겠어요. 그 어린 나이에 버스 타고 학교를 왔다갔다 하는 일이 얼마나 힘들겠어요. 다행히도 6개월이 지난 후에 선생님 배려로 학교 기숙사에 들어가면서 그 고생이 끝났죠. 저도 아들이 6학년에 올라간 이후에는 반대를 안 했어요. 축구로 대학에만 들어가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지성이가 고등학교에 올라갔을 때 감독님께 제발 대학만 보내달라고 했으니까요.(웃음)”



박지성은 안용중학교를 거쳐 수원공업고등학교에서 축구 잘하는 선수로 이름을 높였다. 하지만 체격이 크지 않은 것이 단점이었다. 박성종씨가 아들의 체격을 불리기 위해서 준비한 것이 ‘개구리’였다고 한다. 하지만 집이 가난해서 다른 아이들처럼 풍족하게 뒷바라지 해주지 못해 늘 마음이 아팠다고 한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나이키 축구화를 한 번도 사주지 못할 정도였다. 물론 용돈도 적어서, 아버지의 눈을 피해 어머니가 몰래 만원씩 챙겨준 적도 많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 흔한 호프집 한번 출입하지 않을 정도로 착하게 커준 것이 고맙기만 하다. 박지성이 처음으로 술을 마신 게 대학교 신입생 환영회 때였을 정도.



“잘살았다면 운동하는 데 도움을 많이 줬겠죠. 다른 면에서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으면 지성이가 축구가 아닌 다른 것으로 눈을 돌리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들어요. 일본에서 뛸 때 월급을 보면서 그말을 하더라구요. 1억원을 가지면 뭘 살 수 있냐고? 지성이는 정말 순진해요.”



올림픽 대표팀과 명지대 간의 연습 경기로 인생 달라져

하지만 재능에 비해 박지성을 알아주는 팀은 드물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프로팀으로 가려고 했지만 여의치가 않았고, 그를 찾는 대학도 없었다. 고등학교 감독의 도움으로 명지대학교에 진학했다. 누구도 알아보지 못한 재목을 알아본 것은 당시 올림픽대표팀 허정무 감독이었다. 1999년 3월 올림픽대표팀과 명지대 간의 연습 경기 중 그라운드를 누비던 박지성이 눈에 띈 것. 장래성과 재능을 보고 과감하게 올림픽대표팀으로 차출했다. 당시 대표팀에서 박지성이 가장 막내였다.



“지성이가 친구들하고 MT를 갔을 때 전화를 받았나 봐요. 당시에 지성이는 휴대폰이 없어서 허 감독님이 지성이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서 지성이와 통화를 했어요. 조용히 서울로 빨리 올라오라고. 당시에 지성이도 대표팀 선수가 됐다는 이야기를 믿지 못했데요.(웃음)”



그후부터 박지성은 탄탄대로였다. 청소년대표(19세 이하), 올림픽대표(23세 이하), 그리고 국가대표까지 모두 뛸 수 있는 영예를 얻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아시아 1차 예선 대만전에서 국가대표 엔트리에 포함됐다. 그리고 2001년에는 일본 J리그 교토 퍼플상가에 최연소 한국 선수로 입단했다.



일본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선수 박지성. 그는 교토 퍼플상가에 큰 족적을 남겼다. 2부 리그에 떨어진 팀을 1부 리그로 승격시켰고, 2002-2003 시즌까지 11득점을 했다. 2002 월드컵 경기에서 팀을 4강까지 올려놓은 모습에 일본인들까지 감동했을 정도. 월드컵이 끝난 후 교토부에서는 박지성에게 ‘스포츠상, 특별영예상’을 선사했고, 교토시에서는 ‘월드컵 특별상’을 수여했다.



“한국에서는 잘 모르지만, 대단한 극빈 대접을 받았어요. 구단주는 우리나라로 따지면 이건희 회장 정도 되는 대단한 사람인데요. 박지성을 너무나 아껴줬죠. 지칠 줄 모르고 그라운드를 누비는 모습이 너무 좋았나 봐요. 자신이 죽고 난 후에도 박지성이 일본에 온다면 교토 퍼플상가에서 뛰게 해야 한다라고 말할 정도였으니까요.”



2003년 교토 퍼플상가를 떠나 박지성은 꿈에 그리던 유럽에 진출한다. 2002년 자신을 키워준 히딩크 감독이 지휘하고 있는 PSV에인트호벤으로 이적한 것.



세계적인 선수로 키워낸 감독 히딩크

지난 7월 20일 수원월드컵 경기장에서는 피스컵 대회에 참가한 올림피크 리옹과 PSV에인트호벤의 경기가 있었다. 박성종씨는 이날 수원경기장을 찾아가 히딩크 감독을 만나고 돌아왔다. 박지성 선수에게 히딩크는 제2의 아버지 같은 고마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에 있을 때는 매일 봤는데, 챔피언스리그 끝난 후에는 처음이네요. 참 고마운 분이죠. 지성이가 좋지 않을 때도 계속 지켜봐주고, 기용해주고. 경기가 안 풀린 날에도 저를 보면 등을 툭툭 치면서 괜찮다고 격려해줬어요.”



하지만 에인트호벤에서 1년간은 박지성에게 큰 시련을 줬다. 자신의 기량을 맘껏 보여주지 못한 것이다. 팀 동료와 팬들로부터 많은 욕을 얻어 먹을 정도였다. 박지성을 돌보기 위해 네덜란드로 건너간 박성종씨는 아들의 부진한 모습 때문에 맘 고생을 많이 했다.



“그때 1년 동안은 세 식구가 집에 오면 거의 말이 없었죠. 아들은 아들대로 고생하고 있어서, 함부로 말을 못 하는 거예요. 오히려 아내와 제가 많이 싸웠어요. 아내가 아들을 위한다고 격려해주는 말들이 저는 싫었거든요.(웃음)”



팬들과 선수들의 반발에도 박지성을 계속 기용한 것은 히딩크 감독이었다. 그의 믿음대로 1년이 지나면서 박지성은 예전 모습을 되찾아갔다. 이적 첫해에는 아무런 득점도 못 올렸지만, 이듬해에는 6득점을 올리면서 팬들과 동료 선수들의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2004-2005 시즌에서는 7득점을 올렸고, 챔피언스리그에서는 1골을 넣었다. 박지성의 모습을 눈여겨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박지성의 이적을 제의했다.



“맨유가 지성이에게 입단 제의를 한 것은 정말 큰 사건이었거든요. 챔피언스리그 끝나고 한국으로 귀국하기 하루 전날에 그 이야기를 들었어요. 지성이도 그렇고, 나도 그 이야기를 믿을 수가 없었죠.(웃음) 그런데 지성이는 히딩크 감독이 걸렸나봐요. 저는 이런 기회가 마지막일 수도 있다고, 내년에는 없을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했죠. 에인트호벤에 갔을 때 처음으로 영국 무대에서 뛰고 싶다는 말을 했는데, 그 꿈이 이뤄진 거죠.”



현재 박지성은 영국에서 극빈 대접을 받고 있다. 공항에 가면 직원이 출입구까지 와서 안내를 해주고, 한국에 갈 때는 보디가드의 보호도 받는다. 월세 6백만원 한도 내에서 맘껏 집을 고를 수도 있고, 전용 차량도 받았다. 박성종씨와 장명자씨는 영국에 집이 구해지면 8월 초 건너갈 예정이다.



“맨유에서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죠. 다만 지성이가 자기가 가진 능력만 잘 발휘하면 좋을 것 같은데. 이제는 지혜로운 여자를 만나서 행복한 가정을 꾸렸으면 좋겠어요. 중매보다는 아들이 직접 만났으면 합니다. 저는 독일 월드컵 끝나면 결혼하라고 하는데…(웃음). 지성이가 결혼하게 되면 저는 그때부터 어려운 형편에 있는 아이들을 돕는 일을 하고 싶어요. 그런 아이들이 아직도 많거든요.”



박지성을 임신했을 때 장명자씨는 용이 목을 휘감고 올라가는 태몽을 꿨다고 한다. 박지성은 현재까지 축구선수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환경을 가지고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자신의 실력을 맨유에서 충분히 발휘하는 것이다. 그의 화려한 성공 소식이 영국에서 날아와 국민들의 답답한 마음을 달래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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