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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C 세상을 바꾼 사람들 - 스피드를 향한 집념, 엔초 페라리(Enzo Ferrari)
  2. [HC] 세상을 바꾼 사람들 - 쿠바의 혁명가, 체게바라(Che Guevara)
  3. 스페셜 진시황(THE FIRST EMPEROR OF CHINA)
  4. SBS 그것이 알고싶다 - 등록금, 입학금으로 대학생들의 잔인한 봄, 왜 돈에 좌절하는가?
  5. KBS 특선월드 - BBC 빅뱅 이전에 무엇이 있었나? 빅뱅이론의 모순?
  6. KBS 한국 현대사 증언 TV 자서전 - 시국 사건 1호 변호사 한승헌,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하는 진정한 노블레스오블리주 이야기 2
  7. MBC 스페셜 열다섯살 - 꿈의 교실, 1년쯤 놀아도 괜찮아(아일랜드 교육제도)

HC 세상을 바꾼 사람들 - 스피드를 향한 집념, 엔초 페라리(Enzo Ferra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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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초 페라리가 어떻게 자동차 사업에 띄어들게 되었고, 그가 엄청난 승부욕으로 세계 자동차 경주 레이싱 시장에 엄청난 영향을 키치며 승승장구를 하고, 때로는 큰 위험에 좌절도 하며, 그의 바람기, 가족사 등등 다양한 방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 다큐...

페라리(Ferrari)는 이탈리아 마라넬로에 본사를 둔 스포츠 자동차 제조회사이다. 1929년에 설립되어 엔초 페라리(Enzo Ferrari)가 스폰서 및 창업자로 있던 F1 레이싱팀인 스쿠데리아 페라리를 바탕으로 1947년에 페라리 S.p.A(이탈리아어:Società per Azioni, 영어:Joint stock company, 한글 뜻:합자 회사)로 법인 명칭을 바꾸고 자동차 제조회사로 등록됐다.

역사
스쿠데리아 페라리팀은 엔초 페라리가 자신의 이름을 따서 설립한 F1 경주팀이었으며, 알파 로메오의 자동차를 타고 F1에 출전했으나 후에 스폰서 및 계약 문제, 결함 문제 등으로 알파 로메오 측과 사이가 벌어지며 1939년에는 직접 F1 자동차를 만들기 위해 Auto Avio Costruzioni Ferrari를 모데나에 설립하며 지금의 페라리 공장을 갖게 됐다.
페라리의 기원이 F1 레이싱팀에 있었기 때문에 자동차 경주에 자주 참가해 많은 활약을 했고, 특히 1950년대와 1960년대, 그리고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포뮬라 원을 석권해 오면서, 포뮬라 원 역사상 가장 많은 우승을 차지한 레이싱팀 및 자동차 제조회사(레이싱팀의 스폰서)로 기록되고 있다.
페라리는 1960년대 자금난에 시달리면서, 결국 피아트에 인수되었다.
페라리의 유명한 자동차로는 F40, 엔초, 360 모데나 등이있다
출처-위키백과사전



뭐 이런저런 이야기를 다빼고, 무엇보다 승리만이 그의 유일한 야심이였고, 그 목적을 위해서 모든것을 바친 한 남자의 이야기...



자신의 꿈, 목표를 향해 좌우, 뒤를 돌아보니 않고, 평생 그 일에만 몰두하며 살아온 페라리...
그로 인해 실수나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항상 새로운 차, 새로운 경주에 도전한 그의 삶...
개인적인 사생활을 보면 좀 안습이였지만, 일적으로만 본다면 진짜 사나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파라리의 엔초 관련 홈페이지 - http://www.ferrari.com/English/about_ferrari/History/Pages/Enzo_Ferrari.as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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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C] 세상을 바꾼 사람들 - 쿠바의 혁명가, 체게바라(Che Guev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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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채널에서 2편으로 나누어 방송한 쿠바의 혁명가 체게바라에 대한 다큐멘터리로, 혁명 시작 전의 이야기는 간략하게 다루고, 쿠바혁명을 시작으로 그가 러시아 등과 갈등을 빚으면서 쿠바를 떠나 콩고로 가서 혁명을 하다가 실패를 하고, 볼리비아에서 죽음을 당하는 과정을 잘 보여준 내용의 방송으로, 그의 살해후에 남은 마지막 사진과 쿠바에 그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잘려진 손, 나중에 발견된 그의 유골등을 보여준다.

체 게바라(Che Guevara, 1928년 6월 14일 ~ 1967년 10월 9일)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사회주의 혁명가, 정치가, 의사, 저술가, 쿠바의 게릴라 지도자이다. 원래 이름은 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 데 라 세르나(Ernesto Rafael Guevara de la Serna)이다.

혁명가
그는 아내와 딸 이루디다를 멕시코에 남겨두고 혼자서 쿠바로 향한다.
1956년 11월 25일, 피델 카스트로를 반군 지도자로 하여 총 82명이 8인승 레저 보트 "데셈바르코(그란마)"에 탑승하였다. 그러나 너무 많은 사람이 타서 위생 등의 환경이 열악하였다. 또한 눈에 띄지 않기 위해, 폭풍 속에 출발했기 때문에 7일 후 12월 쿠바에 도착했을 때 많이 지쳤고, 사기도 떨어져 있었다. 반군의 상륙 계획을 카스트로가 미리 발표하였기 때문에 그 내용이 쿠바 정부에 유출되어 반란군은 도착 직후부터 정부군의 습격을 받아 괴멸 상태가 되었다. 결국 살아서 도착할 수 있었던 사람은 82명 중 게바라, 피델 카스트로, 라울 카스트로, 카밀로 시엔후 에고스, 루이스 크레스포, 호세 모얀, 훌리오 디아즈, 카리스트 가르시아, 카를로스 베르데무스 등 12명뿐이었다. (생존자가 17명이라는 설도 있다.)
당시 카스트로는 혁명에 실패하여 감옥살이를 했었는데, 재판 당시 피델 카스트로는 판사 앞에서 〈역사가 나중에 나를 다시 평가할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한다. 체 게바라등의 동지들의 참여로 다시한번 혁명에 도전하여 친미성향의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붕괴시킨다.
상륙 후, 반군은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에 잠복하여, 산골 마을을 전전하면서 군 재건을 도모했다. 이후 쿠바 국내에서 활동하던 반정부 세력과 합류에 성공하여 반군 세력은 점차 강화되어 갔다. 당초 부대에서 게바라의 역할은 군의관이었지만, 혁명군의 정치 방송을 하는 라디오 방송국(라디오 레베르데)을 설립하는 등 정부군과 전투에서 그 인내심과 성실, 상황 분석, 냉정한 판단력,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점차 반군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도착 1년 후 병력 증가에 따른 부대 개편 시, 카밀로와 라울 등을 그대로 두어, 카스트로부터 제 2군(이름은 제 4군) '코만단테'(사령관, 지휘관 아래에 분대와 분대를 지휘하는 "대장"이 있다)에 임명되어 지휘권과 소령의 계급을 받아 카스트로에 이어 명실상부한 반군 이인자가 되었다.
1958년 12월 29일에 제 2군을 이끌고 쿠바 제 2의 도시 산타클라라에 돌입한다. 많은 시민의 가세로 적들을 제압하고 수도 아바나로 가는 길을 열었다. 1959년 1월 1일 오전 2시 10분 후 르헨시오 바티스타가 도미니카 공화국에 망명하자, 1월 8일 카스트로가 아바나에 입성하여, 쿠바 혁명이 달성되었다. 투쟁적인 업적과 헌신적인 작업으로 쿠바 시민권을 부여받아 쿠바 새 정부의 각료가 되기에 이르렀다.

정치인
그는 쿠바혁명 승리후 쿠바 공산당과 쿠바 혁명정부의 중요직책에 있으면서 쿠바혁명에서 얻은 것들을 지키며 혁명을 더욱 전진시키기 위하여 정력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여기서는 사형제를 부활시켜 친미또는 반혁명세력 약14,000명을 죽였였다. 쿠바혁명 승리 후 얼마간 아바나의 라 까바니아 요새수비대 사령관으로 있다가 산업발전을 조종하는 책임자로 있었으며 동시에 토지개혁의 준비에 참가하였다. 1959년 11월∼1961년 2월에 쿠바국립은행총재, 1961년 2월부터 쿠바산업부장관도 함께하였으며 1962년에 쿠바통일혁명조직 전국지도부 및 비서국에서 일하여 '쿠바의 두뇌'라 일컬어졌다.

사망
그는 쿠바에서 많은 일들을 했음에도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일을 찾아 떠났다. 1965년 4월, "쿠바에서는 모든 일이 끝났다"라는 편지를 남기고 행방이 묘연해졌다. 이 때 쿠바를 벗어나 볼리비아로 투쟁무대를 옮겨 바리엔토스 정권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였으나, 1967년 10월 9일 미국이 가세한 볼리비아 정부군에게 잡혀 총살당했다. 그의 시체는 30년후 볼리비아에서 발굴되어 그가 혁명가로 활동했던 쿠바에 안장되었다.

평가
체 게바라는 볼리비아 혁명 당시 사상적 동지인 볼리비아 공산당의 지원과 지역주민들의 적극적 지지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반정부혁명을 벌였다. 결국 게릴라전에 패해서 볼리비아군에게 사살당하고 말았다.
체 게바라는 사후에 전 세계적으로 '체 게바라 열풍'을 일으킬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그 이유로서 쿠바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도 이를 박차고 또 다른 혁명을 위해 헌신하는 숭고한 모습이 사람들을 감동시켰기 때문이다.하지만 체 게바라는 반혁명 세력과 가담하지 않은 농민과 콩고와 볼리비아에서 수많은 농민들을 죽였고 당시 쿠바에 살았던 사람들은 체 게바라를 ‘아바나 백작’이라고 붙었다..

출처 - 위키백과사전


볼리비아에서의 체포당시의 체 게바라...

체 게바라 - Investigation A Legend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체 게바라 평전


9발의 총알을 맞은후에 인물작가가 찍은 그의 마지막 모습


쿠바에 그의 죽음을 입증하기 위해서 처음에는 머리를 자르려고 하다가, 반대로 그의 손을 잘라서 보냈다고....


사후에 발견된 게바라의 유골사진...

게바라가 사회주의를 말하고, 테러리스트로 불리우는데, 실상 그는 순수주의자였고, 테러에는 반대를 했지만, 사회에 대한 부조리에 표현이 끔찍한 일들을 저지른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남긴 메세지는 이 세상을 사회주의화하자라는 이야기보다는 세상을 좀 더 나은 세상으로 바꾸기 위해서 편안하게 지낼수도 있었지만, 자신의 안위를 버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진정으로 국민.. 아니 사람을 아끼고 사랑한 휴머니즘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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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진시황(THE FIRST EMPEROR OF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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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의 출처는 정확하게 모르겠다. 제목이 같은 아이맥스(imax) DVD도 있는데, 내가 본것은 짧은 시간동안 그의 집권초기부터 그의 사후 3년만에 진나라가 망하는 모습까지를 그린 다큐

걸작다큐 2000년의 전설, 진시황제
경제세미나 - 사기열전, 인물로 본 인재경영, 김원중교수(건양대)
중국 진나라의 인재고용정책 - 축객(逐客), 객경(客卿), 태산불사토양고대(泰山不辭土壤故大) 하해불택세류고심(河海不擇細流故深)

정말 대단한 야심가에 욕심도 많았지만, 그로 인해서 모든것을 얻었고, 중국사에 큰 업적을 이루었으며 지금의 중국이 차이나(China)라고 불리게 된것도, 바로 진나라 때문이라는...



황제(皇帝), 제왕(帝王), 왕(王)의 차이점은?
중국을 통일해서 평화시대를 열고, 황제라는 칭호를 처음으로 쓴것도 그가 처음이고, 만리장성 등을 축조하기도 했고,
분서갱유로 책을 태우고, 학자들을 생매장하는등 폭군이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하는 진시황제...



얼마나 죽은것이 아쉽고, 가진것에 대해서 미련이 많이 남아서 이런 유물을 남기기까지 했는지...
하지만, 내시의 음모로 왕위를 이어받을 큰아들은 자결을 하고, 엉뚱한 놈이 왕위를 이어받은후에 3년만에 망했다니, 하늘에서 이를 본다면 치를 떨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대업이나 성공을 이루는것은 수많은 대가를 치루면서 어렵게 오르는것이지만,
망하는것은 한순간의 실수로도 벌어질수 있다는것을 명심하자.



진 시황제(중국어: 秦始皇帝, 병음: Qín Shǐ Huáng Dì, 기원전 259년 1월 ~ 기원전 210년 음력 9월 10일)는 진나라의 제31대 왕이며, 중국 최초의 황제이다. 이름은 영정(嬴政)이며, 조나라에서 출생하였기에 조정(趙政)이라고도 한다. 진 장양왕 영자초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당시 세도가 대단하던 조나라의 상인 출신의 승상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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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그것이 알고싶다 - 등록금, 입학금으로 대학생들의 잔인한 봄, 왜 돈에 좌절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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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정부지로 오르는 물가를 능가하는 대학교 입학금, 등록금... 학생들은 대출을 통해서 학자금을 마려하기도 하고, 아르바이트를 뛰어서 감당을 하지만, 문제는 대학을 나오면 취업이 보장되는것도 아니고, 결국에는 대학졸업장과 남은 빚을 들고 사회로 떠밀리는 작금의 모습...
있는 집의 아이들은 열심히 공부하는동안, 없는 이들은 학비를 벌기위해 잠을 없애가며 일을 한다. 거기에다가 젊었을때의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교육과학기술부 차관의 말은 어이가 없을뿐이다.

이런 등록금때문에 학업을 포기하고, 심지어는 자살까지 하고 있는 세상인데, 대학측은 지금도 아주 저렴한 편의 학비이며, 더 올려야 한다고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OECD 국가중에 대학교육비가 두번째로 높은 것이 대한민국이고, 첫번째가 미국인데, 미국 하버드대학의 실체를 들여다보니 표면적으로는 1억원의 학비이지만, 가족의 수입에 따라서 전혀 학비를 안내거나 10%만내도되는(연간수입 12만달러 이하) 학생들이 부지기수이다.

세계 각국의 학자금 대출 이자 비교


그럼 대학들은 이런 돈을 걷어서 어디에 쓰는것일까?
예산을 짤때는 빠듯하게 짜서 올해 이만큼을 인상해야 한다고 말을 하지만, 실제로는 예산과 결산의 차액을 통해서 그 잔액을 적립한다. 한해 몇백억, 몇천억의 돈을 적립해서는 그 돈을 가지고 부동산을 사들이고, 펀드에 투자를 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대학교를 운영하는 사학재단들이 대학교를 교육사업으로 인재를 키워낸다는 생각이 아니라, 사설학원처럼 교육사업을 통해서 부를 쌓는 수단으로 삼을뿐이다.

언제부터인지 대학을 나오지 못하면 사람대접을 못받는다는 사회인식이 팽배해 있다.
그래서 죽어라하고 빚을 내가며 졸업을 하지만, 남은것은 빚밖에 없는 88만원 세대들...

최근에 복지가 화두가 되어가고 있는데, 방송중에 나온 프랑스나 유럽의 사례등을 통해서 우리나라에도 이제는 의무교육까지는 아니더라도, 대학도 반값 등록금이 아니라 거의 중고등학교 수준의 학비로 다닐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제는 그 범위가 많이 넓어졌지만, 대학교육이 이제는 최소한의 기본 교육으로 가고 있는 이상 누구나 공부를 하고 싶고, 교육을 받고 싶다면 돈 걱정없이 공부를 하는정도는 국가에서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한나라당, 강남불패신화 왜 그럴까?
뭐 중고등학교 무상급식도 좌빨, 사회주의라고 말을 하고 있으니 실현가능성이 있을런지는 모르겠다.
이제 곧 국회의원, 대통령 선거들아 다가온다.... 우리가 누구에게 선거를 하느냐에 따라서, 학생들의 등록금이 달라지고, 우리 아이들이 가난한 집 아이라는 차별없이 급식을 받지 않을까 싶다.
그것이 알고 싶다(792회) 방영일 : 2011-03-12    
       
대학생들의 잔인한 봄 - 왜 돈에 좌절하는가?

▣ 방송일시 : 2011년 3월 12일 (토) 밤 11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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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특선월드 - BBC 빅뱅 이전에 무엇이 있었나? 빅뱅이론의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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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분야에 관심은 많지만, 깊은 내용은 거의 전무한 상황이라서 알듯말듯한 내용의 방송.
빅뱅이 있었다는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빅뱅이론이 모순이 하나도 없이 완벽한것도 아니거니와 빅뱅이전을 어떻게 설명할것이며,
그럼 그 전에는 전혀 아무것도 없던 세상이다가 갑자기 이런 세상이 펼쳐졌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면, 이에 대해서 다양한 의견을 내는 박사님들의 이야기...

히스토리 채널 - 대우주 - 빅 뱅
사이언스 21 - 우주, 그 끝은 어디인가?
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


이런 방송에 자주 출연을 하는 일본계 미치오 카쿠 교수는 그 無라는것을 어떻게 정의를 하느냐에 달려져 있다고 말을 하기도 하고, 어떤 과학자들은 이런 빅뱅이 계속 반복되는 순환론적인 가설 또한 제기를 하며, 어느 학설에 메여있지 않고, 자신의 가설을 뒤집어 가면서 다시 연구를 거듭하는 과학자들의 멋진 연구자세도 보여진다.

과학을 넘어서 철학적인 부분에 까지 언급을 하지만, 뭐 역시나 정답은 아직은 모른다는것이다.
그 또한 언젠가는 밝혀질것인지, 영원한 미제의 문제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뉴튼의 중력 세상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으로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었듯이,
이에 매진하는 과학자들로 인해서 또 언제가는 새로운 세계관이 나오지 않을가 싶다.

그리고 그것이 나오는 순간, 어쩌면 우주와 우리 삶의 진리 또한 밝혀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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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한국 현대사 증언 TV 자서전 - 시국 사건 1호 변호사 한승헌,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하는 진정한 노블레스오블리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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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에 기대어 자신의 입신양명만을 꿈꿀수도 있는 변호사라는 직업이지만, 진정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 살아가신 시국사건 1호 한승헌 변호사

검사출신으로 변호사가 된후에 박정희, 전두환, 김대중, 노무현 정권등을 거치면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주는데, 역사적으로 밝혀진 내용과 크게 다를바가 없지만, 그 이야기들을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짧은 시간에 축약해서 들어보니 꽤 충격적이고, 지난 군사정권들의 폭정이 어이가 없을뿐이다.
정말 말도안되는 수많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꺽이지 않은 기개가 참 대단하신듯 한데, 정말 진정한 법조인이자, 이 시대의 양심이 아닐까 싶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과 대통령에 대해서는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를 하는듯한데, 이러한 부분도 언젠가는 진실로 밝혀지는 날이 오리라 믿는다.

PD수첩 - 민변 20년, 사람이 하늘이다

세상은 이러한 분들 때문에 자정되고, 더 나은쪽으로 조금씩 변화가 되어가는것은 아닐까 싶다.
뭐 혹자는 이런분들을 빨갱이, 좌빨이라며 기득권층과 권력층을 옹호하기도 하지만, 정작 그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고, 위해주는 사람이 누구일지를 곰곰히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무소불위 군사독재 시절 시국사범들을 변호하며 인권 수호에 헌신한 시국 사건 1호 변호사’ 한 승 헌.
변호사 자격 박탈, 실형 선고 등 갖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정의의 편에 서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던 법조계의 살아있는 양심!
파란만장한 46년, 그가 변론한 시대의 아픔을 통해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사를 되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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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스페셜 열다섯살 - 꿈의 교실, 1년쯤 놀아도 괜찮아(아일랜드 교육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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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의 청소년들은 15세에 1년동안 공부가 아닌, 봉사활동, 체육활동, 직업 체험 등을 통해서 1년간을 하고 싶은것을 마음껏하면서 보낸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저런 제도를 실행한다면 어떨까?
여론이나 학부모나 난리가 날듯한데, 아일렌드 역시 처음에는 3개의 학교만 도입을 하고, 그나마도 시행이 쉽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1년의 안식년같은 시간동안 아이들이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것, 원하는것을 찾고, 그 이후에는 자신이 스스로 결정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게 되면서, 전체적으로 이런 교육시스템을 갖춘듯 하다.
기업이나 공장등에서 15살짜리 아이들을 받아서 직업체험을 받는것이 번거롭고, 부담스러울수도 있지만, 사회적인 기여로 생각하는 사람들...

우리나라의 아이들을 떠올려본다.
자기 자신의 정말 원하는것을 찾는것이 아니라, 대부분은 성적순으로 안정적이고, 고소득의 직업, 폼나는 직업을 선택한다.
그런 직업군들의 행복도나 만족도가 떨어지는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싶다.

직업만족도 통계 조사 결과


이러니 아일랜드의 경제가 구조조정에 구제금융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물론 1년을 준다고 해서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꿈이나 직업을 찾을수 있는것도 아닐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무조건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에 가야한다는 말만 할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너 자신은 누구이고, 너는 어떤 사람인지를 발견할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었던 멋진 방송

어찌보면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그런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방영 : 2008/01/12 23:40
더블린에 사는 열다섯 살 조나단은 앞으로 일 년은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신이나 있
다. 기타리스트가 꿈인 이 아이는 기타전문점에서 일도 배우며 봉사활동과 체육활
동 등으로 일 년의 대부분을 채울 예정이다. 같은 반 다른 친구들도 비슷한 분위기.
도대체 무슨 연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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