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구 홍제동의 동명 유래 - 홍제원(弘濟院), 환향녀(還鄕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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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제원(弘濟院)
무악재는 좁고 가파른 고갯길이었지만, 서울 서북쪽으로 개성·평양·의주 방면으로 뻗는 제1국도였기 때문에 교통·통신상 매우 중요한 관문의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조 선시대 한성으로부터 각 지방에 이르는 간선도로는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의하면 9개가 있었다. 그 가운데 제1로가 돈의문(서대문)으로부터 무악재를 넘어 평안도 의주까지 총 1,086리에 이르는 도로였다. 이 도로는 연행로(燕行路) 또는 사행로(使行路)로도 불리었는데, 중국의 사신이나 우리나라 사신의 통행로로 이용되었으므로 전국 간선도로망 가운데 가장 비중이 컸던 도로였다.
무악재 북쪽 인왕산 기슭 현재 지하철3호선 홍제역 북동쪽 출입구 부근(홍제동 138번지)에 홍제원(弘濟院)이 있었다. 중국사신이 한성으로 입성하기 위해 무악재를 넘기 직전 홍제원에서 마지막으로 휴식을 취하고 예복으로 갈아 입었다. 홍제원은 국립여관이라 할 수 있는 도성 부근 4개의 원(院) 가운데 하나였는데, 중국사신이 이용하였으므로 다른 원보다 규모가 컸으며, 누각이 있고 중국사신이 묵는 공관(公館)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홍제원 건물은 청일전쟁(1894) 때까지도 남아 있었다.
홍제원은 또한 중국으로 가는 우리나라 사신 일행이 환송 나온 사람들과 작별하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홍제원 주변에는 술을 파는 색주가와 길손에게 떡을 파는 떡집이 많이 있었다. 떡 중에도 인절미가 특히 유명하여 ‘홍제원 인절미’라면 소문이 자자하였다 한다.

친구와 술을 마시다가 세검정, 왕십리등의 동명의 유래 이야기가 잠깐 나왔는데, 한 친구가 홍제동의 유래를 중국에 인질이나 조공등으로 바쳐졌던 여자들이 다시 우리나라에 돌아오면 창녀나 더러운 여자라고 핍박을 받았는데, 왕이 서울로 올때 어떤 고개를 넘으면 깨끗해 지는것으로 사해준다고 해서 홍제동이라고...
그럴싸하게 들렸는데, 찾아보니, 국립여관인 홍제원이 위치해서 동명이 유래되었다고...-_-;;

다만 전혀 뻥은 아닌것이, 외국에 끌려갔던 공녀들은 환향녀라고 불리우며 주홍글씨처럼 낙인을 찍혀서 이혼을 요구당하기도 했다는데, 조선 인조때 정묘, 병자호란 당시 환향녀들이 서울로 돌아오는 길의 마지막 부근인 홍제천에서 몸을 씻으면 몸과 마음이 깨끗해진다라고 말해서 공녀를 구제하려고 했고, 서울외에도 각도에서 이런 방식을 차용했다고...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병자호란으로도 많은 여인들이 남의 나라로 끌려갔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왔을 때 그녀들을 맞이한 것은 '환향녀(還鄕女)'라는 주홍글씨였다. 돌아온 여자들의 남편들은 공개적으로 이혼청구를 했단다. 선조 때 "이혼을 요청한 상황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나 절개를 잃은 것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허락할 수 없다"고 이혼청구를 거절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남편들은 첩을 얻어 부인을 멀리 했다.

 인조 때 정묘, 병자호란으로 환향녀가 되었던 여자들도 이혼요구를 받았다. 인조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에 첩을 허용했다. 인조는 공녀가 환향녀가 되어 돌아올 때, 들어오는 길목에 흐르던 '홍제천에서 몸을 씻으면 몸과 마음이 깨끗해진다'고 명했다. 홍제천을 통해 공녀를 구제하려 했다. 나중에는 각 도에서도 행할 수 있게 했단다.


홍제동
 * 홍제동은 중국사신이 드나드는 중요한 육로에 위치한 지역으로 중국사신 및 여행객들이 머물렀던 현재의 국립 여관격인 홍제원이 이 지역에 위치하여 동명이 유래되었으며, 원래는 홍제원의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홍제 내리라고 하다가 광복후 홍제동으로 바뀌었다.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홍제내리에 속하였고, 1936년 경성부로 편입되면서 홍제정으로, 다시 1946년 홍제동으로 바뀌었다. 1950년부터 1970년까지 안산동사무소 관할이었다가, 1970년에 홍제1·2·3동으로 분할되어 행정을 담당하였으며, 1975년에 다시 홍제2동이 2동과 4동으로 분할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홍은동
 * 홍은동이란 이름은 예전의 경기도 은평면 홍제외리 지역이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홍제외리의 ‘홍’자와 은평면의 ‘은’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홍제외리에 속하였고, 1949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홍은동으로 바뀌었다. 1964년 홍은1·2동으로 분할되었고 1970년과 1975년에 홍은3·4동이 새로 생겼다. 1980년에 홍은4동이 폐동되면서 홍은2동에 통합되었다.

남가좌동
 * 가재가 많고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가재울』이라고 하던 것이 한자음으로 가좌리라고 하다가 가좌동이 되었으며, 가재울 남쪽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남가좌리에 속하였고, 1949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편입되면서 남가좌동으로 바뀌었다.

북가좌동
 * 가재가 많고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가재울', 한자음으로 가좌리라고 하다가 가좌동이 되었으며, 동 이름은 가재울 북쪽에 있다는 데서 붙여졌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북부 연희방 가좌동2계(加佐洞二契)로 부르던 지역이었다.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북가좌리(北加佐里)에 속하였고, 1949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편입되면서 북가좌동이 되었다.

충현동
 * 현(現) 중앙여고 내에 위치하고 있었던 의령원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원자인 의소(懿昭) 세손 정(정)의 묘소이며 일명 ‘애기능’으로 불려왔다. ‘애기능’이 위치한 고개라 하여 ‘애오개’라 불리다가 ‘애오개’에서 유래한 한자어인 『아현(阿峴)』으로 불리워졌다고 한다. 일제시대 북아현정으로 불리다가 1946년 북아현동으로 바뀌었다. 1964년 대현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완료되어 마포구 아현동과 신촌로 이북지역 대부분이 북아현동에 편입되었다. 1955년에 북아현 1·2·3동으로 나뉘어졌고 2008년 5월에 충정로동과 북아현3동이 통합하여 충현동으로 명칭변경이 되었다.

천연동
 * 동 이름은 동명여자중학교 자리에 있던 정자 천연정(天然亭)에서 유래하였는데, 이 천연정은 무악재를 오가는 관원들을 맞이하고 전송하는 연회장이었다고 한다. 1914년 지역의 구획을 새로 정할 때, 구한말까지 불리워오던 이판동 일부와 석교동 일부를 합하여 만들어졌고, 1975년 교남동 지역 중 의주로 서쪽 대부분이 편입되었다. 법정동으로서 행정동인 천연동·냉천동(冷泉洞)·옥천동(玉川洞)·영천동(靈泉洞)·현저동(峴底洞)으로 이루어져 있다.

북아현동
 * 조선시대에는 성안에서 사람이 죽으면 동쪽의 광희문과 서소문을 통해야만 시체를 나가게 하였는데, 특히 아이 시체는 이 고개를 지나서 묻게 하였다 하여 “아이 시체가 넘는 고개”아는 뜻으로 『아현』 이라 부르던 것이 동명이 되었다고 하나 정확하지는 않다. 일제시대 북아현정으로 불리다가 1946년 북아현동으로 바뀌었다. 1964년 대현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완료되어 마포구 아현동과 신촌로 이북지역 대부분이 북아현동에 편입되었다가 1955년에 1·2·3동으로 나뉘어져 있다가 2008년 5월6일 북아현1·2동이 통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신촌동
 * 조선시대에 한성부 북부(西部) 연희방(延禧坊)에 속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연희방 새터말이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연희면에 편입되면서 고양군 신촌리가 되었다가 1936년 1월 경성부의 지역 확장으로 경성부에 편입되어 일본식 지명인 신촌정이 되었다. 1940년 7월 경성부 북부출장소 신촌정, 1943년 6월 경성부 서대문구역소 신촌정, 1945년 10월 구제(區制) 실시로 신설된 서대문구 신촌정이 되었다. 1946년 10월 일제 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정(町)을 동(洞)으로 고칠 때 신촌동이 되었다.

연희동
 * 조선 초 양주 땅이었던 이곳은 태조가 신도읍지를 찾고 있을 때 무악재 아래에 위치 북쪽에 나지막한 산봉우리가 있고 동서쪽으로 산맥이 뻗어있는 명당터라하여 하륜 등이 도읍지로 적극 천거했던 지역 으로, 연희동의 동명은 현재 연세대학교가 있는 자리로 추정되는 연희궁터의 이름에서 연유된 것이라 한다. 조선시대에는 정자동, 염동, 궁동, 음월리라 부르던 지역으로 일제 때 경기도에 속하다가 다시 경성부에 속하여 연희정이 되었으며 1946년 연희동으로 개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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